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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0-04-21 16:21
조회 :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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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는 집
김창식
정능동 산1번지 '해뜨는 집'에 세 들어 살던 시절이 생각난다. 집은 산마루턱에 위치했는데, 문패와 담장은 물론이고 변소도 없었다. 그 집에 부모님과 다섯 형제가 함께 살았다. 수녀원으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 초입에 있던 집은 방이 세 개였다. 큰 방은 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식구들이 사용했으며, 사랑채에 방이 두 개 더 있었다. 작은 방은 장남이며 수험생인 내 차지였고, 다른 큰 방을 20대로 보이는 부부에게 세를 들였다. 세를 사는 세입자가 방 하나를 또 세를 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였다. 그들 부부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또렷하다. 남자는 까칠한 검은 얼굴에 한복을 입었고, 여자는 유난히 창백한 얼굴에 지쳐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행색과 분위기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여느 사람과 사뭇 달랐다. 불안감과 망설임이 묻어난다고나 할까, 항상 주위를 살피며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웠다. 그들을 떠올리면 유리에 베인 듯 가슴이 아려온다.
어느 날인가 시험 때여서 새벽녘까지 깨어 있었는데 갑자기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 기울여보니 마루를 격한 옆방에서 나는 것 같았다. 숨을 죽이고 있노라니 이번엔 남자의 억눌린 숨소리에 섞여 여자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히 한숨도 배어 나왔다. 여자가 몹시 아픈가 보다 걱정이 되었다. 이윽고 정적이 찾아 들었다. 잠시 후 여자의 흐느낌이 들렸고 두런두런 하는 남자 목소리가 뒤따랐다. 다음날 아침 그들 부부와 마주쳤는데 별 내색이 없어 나도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 후 자연 옆방에 신경이 쓰였는데, 야심한 밤이나 이른 새벽에 가끔 그런 일이 있었다. 순서는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서로 간에 말다툼으로 시작하여 여자가 흐느끼면 남자가 달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 날이면 생각이 뒤엉켜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내가 단단히 병이 난 것 같았다. 여자가 한탄하듯 흐느끼는 소리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았다.
한번은 학교를 다녀와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마루에 나와 있던 남자가 손짓해 불렀다. 공연히 주눅 들어 하던 부부였는데 나를 불러들인 것은 좀 뜻밖이었다. 얼핏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부부의 방은 처음 들어가 보는데 방은 단촐 하였다. 한 쪽에 개어 놓은 침구, 원래 우리 것인 미닫이 장롱, 크고 작은 가방과 몇 개의 보따리가 세간의 전부였다. 초라했지만 한편 정갈해 보인 것은 코끝에 스며드는 묵향(墨香)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글씨를 쓰는 중이었는지 바닥에 여러 장의 한지가 놓여 있고, 여자는 한쪽에 단정히 앉아 먹을 갈고 있었다. 여자는 내게 아는 체를 하더니 다시 먹을 갈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공부 열심히 하여라. 나도 한 때 뜻을 두었었지만… 허허, 이제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
남자가 말과 함께 바닥에 놓여 있던 종이 중에서 금방 쓴 듯 향기기 진한 글씨 한 점을 내게 주었다. "아버지는 잘 뵐 수 없으니 어머니께 드려라." 그때 아버지는 일 관계로 집에 잘 들어오시지 않았다. 이어서 그가 혼잣말로 시를 읊듯 중얼거렸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도다!" 왠지 예배당에서처럼 분위기가 엄숙했다. 그가 쓴 글씨인 '은미처 불괴청천(隱微處 不愧靑天)' 종이를 어머니에게 전해 드렸는데 어머니는 가타부타 말없이 미닫이 서랍에다 간수하였다. 어머니 얼굴이 얼핏 흐려졌다. 나중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고문(古文) 시간에 글씨의 뜻을 정확히 알게 됐다. 삼국지에 나오는 구절로서 '어디선듯 푸른 하늘에 부끄러움 없어라'라는 뜻이었다. 그 후 몇 번 이사를 다니는 통에 그 글씨도 다른 소소한 물건과 함께 잃어버렸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와 그 여자가 무슨 말인가 하고 있다가 서둘러 이야기를 끝냈다. 헌데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고, 숫제 눈물범벅이었던 여자는 눈물을 훔치며 뒤꼍으로 사라졌다. 우리 가족과 그들 세입자의 동거는 몇 달 가지 않았다. 그들 부부가 이사를 간 것이다. 짐은 단출하였다. 가방과 크고 작은 괴나리봇짐 뿐. 그간 요와 이불은 우리 것을 써 왔던 것이다. 떠나던 날, 남자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그간 폐가 많았습죠." 어머니와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여자는 무엇을 잘못한 사람처럼 남자 뒤에 숨어 있다 눈물을 찍어내더니 어머니 손을 몇 번 흔들고는 서둘러 남자의 뒤를 따라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자주 거처를 옮겨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그들 부부가 떠나고 난 뒤 자꾸 옆방에 눈이 갔고 기척에도 신경이 쓰였다. 허전함인지 슬픔인지 모를 야릇한 느낌도 몰려들었다. 얼마 안 돼 어머니와 이웃집 아주머니가 젊은 부부에 대하여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 끝에 어머니가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글쎄, 그것이… 배다른 오누이였대지 뭐예요!"
그 후 그들을 본 적이 없고 우리도 '해뜨는 집'을 떠났다. 이제 철이 들고 이것저것 알 나이가 되었다. 그들 부부는 갓 사춘기에 들어선 나를 내밀한 관능의 부름에 눈뜨게 해 준 듯하다. 그들 부부를 생각하면 그날 밤의 정황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며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좀 더 커가면서 언제부터인가 그들 부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대신 애틋한 마음이 찾아들었다. 그들 부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거룻배를 타고 자유를 찾아 세상의 끝에 이르렀을까. 볕도 들지 않은 숲을 지나 척박한 땅을 태워 밭을 일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그들은 글씨로 떳떳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삶에 대한 희원(希願)을 나타내 보였다. 그밖에 그들 부부가 내게 준 가르침이 또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그들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불우하고 뒤처졌으며 응달에 있는 이웃들을 항상 따뜻한 시선으로 보라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일깨움이 아닐는지….
김창식
*시에티카 2(2010년 상반기)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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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0-04-22 1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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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같이 써진 수필 잘 읽고 갑니다. 흐르는 세월의 저편을 떠올리게 합니다. 해뜨는 집 처럼 우리 모두 그렇게 그런 시절들이 있었지요. 길 떠나는 그 부부의 생각으로 애틋한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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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4-22 1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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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말씀처럼 콩트적인 구성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사유를 진전시켜 나가는 전통 문예수필에도 관심을 기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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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10-04-24 10: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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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시선들이 온통 수필감으로 넘쳐나는 듯, 작가로서의 김창식선생님의 열정이 뜨겁습니다. 많이 습작하시는데서 나오는 진솔한 이웃의 삶의 이야기,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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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4-25 0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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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명화 선생님, 화요일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셨죠.
그 말씀 항상 새기고 있습니다. "보려고하는 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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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0-04-25 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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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민감한 나이에 흔치않은 경험을 하셨군요. 암울한 시절의 이야기가 `해뜨는 집`으로 대비되니 더욱 극명하게 부각되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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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4-25 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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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택 선생님, 지난 행사때 뵙고 인사드려 기뻤습니다.
1970년대 정능을 떠난 후 같은 서울인데도 이상하게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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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0-04-26 1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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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글을 올려주시는군요.
창작의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글 또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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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4-26 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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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글감을 보(洑)에 가두어 놓아서 입니다, 최복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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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우 |
10-05-25 0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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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한 느낌을 주는 글이네요.
과연 선생님다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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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5-25 1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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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우 국장님, (못)뵌지 오래되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만 '추리수필'이 되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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