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안개



                                                             박원명화

  아침부터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차 한 잔이 생각나 주방으로 나왔다.  

물이 끊는 동안 창밖을 내다봤다. 어느새 혹독하던 겨울이 떠나고 앙상하던 

나무 가지들이  겨울잠을 깨고 눈을 부비는 생명의 맥박소리가 한창이다.

  생각이 정지 된 체,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창밖에 나무들에게 시선을 꽂

는다. 황사에 잔뜩 찌푸린 하늘이 금방이라도 봄비가 쏟아져 내리듯 을씨년스

럽다. 휑뎅그렁한 집안의 분위기가 새삼 외로움을 부추긴다.

  혼자 있는 시간, 가끔은 지나간 세월들을 떠올린다. 갈수록 빛이 바래지는 사

진과 달리 내 마음속의 삽화는 갈수록 생생하게 살아있다. 미술관에 소장될

만한 값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는 알콩달콩 살았던 시간들이 아닌가. 

사소한 일상사에서부터 아이들 키우며 좌충우돌 했던 것에 이르기까지, 마치 

시멘트 바닥사이를 톡톡 가르고 오르는 민들레꽃처럼 싱싱하게 되살아 난다. 

  아이들이 다 잠든 밤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들여다보지만 두어 페이지 

읽지도 못하고 꾸벅거리기 일쑤였다. 순간순간 밀려드는 생활 걱정에 마음은 

언제나 거친 들녘처럼 메말라 있었다. 대부금 갚을 날이 언제더라. 내달 있을 

시댁의 사촌형님 댁 경사엔 축의금 얼마를 내야하나. 쑥쑥 자라는 아이들 옷 

걱정, 도시락 반찬 걱정 등등…. 시장에 가서도 맛있게 먹는 식구들 식성을 먼

저 생각하며 이것저것 골랐다.

  박봉에 아이 셋을 키우면서 손발 저린 날들이 많았다. 양팔이 빠지도록 사들

여도 막상 집에 와 헤쳐 보면 먹을 건 별로 없고 다음날 또 시장 볼 일이 생기곤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갈 적마다 돈 달라고 손 벌리는 날이 커갈수록 더 많았다. 

  절망으로 눈물짓던 시간들, 어쩌면 내 욕심이 부른 갈증의 소산이었는지는도 

모르겠다. 내 소망이 크면 클수록 얻는 것 보다 잃은 게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부풀어 오르는 마음은 잡지 못하고 오로지 내일의 삶이 더 윤택해

지기를 꿈꾸었다.

  나 혼자만이 그렇게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세상 모든 아내들의 

일상이요, 엄마들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포기하고 산다는 게, 

긴장감속에 묻혀 산다는 게, 하루 종일 애들과 씨름하며 산다는 게, 왜 그리 힘

겨웠던지 그땐 정말 살찐 틈도 없었다. 가끔 터무니없는 자유를 누리고 싶을 땐 

그 불통이 만만한 남편에게 떨어트리곤 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어 세월이 하루빨리 흘러가기를 바랬고, 아이들이 

어서어서 커서 빛나는 어른이 되기를 바랬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그렇게 

산 게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자괴감이 들면서도 그나마 사람 냄새 풍기며 살던 

때가 그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분신처럼 옆에 끼고 있던 아이들 셋을 작년 한해 모두 떠나보냈다. 아들과 

큰딸을 제금 나고 막내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식구가 줄어들자 시간들이 

갑자기 넘쳐났다. 영화도 보고, 음악회도 가고, 서점도 가고, 옷도 사고 화장

품도 사 보았지만 알 수 없는 텅 빈 마음을 채울 수가 없어 한동안 허둥댔다. 

  아직도 나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삶의 원정길에 선 예비병일 

뿐. 세상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삭풍 같은 삶이 무서워 오늘도 나는 여전히 방

탄복속에 온 몸을 감싸고 있다. 다섯 식구가 살든 두식구가 살든 삶의 수레바

퀴는 쉼 없이 굴러간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중에 고요하던 집안이 주말엔 

한꺼번에 벅적대는 현상이다. 

  경상도 구미에 사는 아들내외가 오고 수원에 사는 딸네 식구가 온다. 주말이

면 밀물이 밀려든 해변을 거니는 기분이랄까. 복닥거림 속에 진정한 사람냄새를 

느낀다. 텅 비어 있던 온 집안이 꽉 찬 들어찬 것 같다. 분주히 오가면서 그 애들

이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 먹이는 즐거움이 그저 좋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느낌이다. 

  삶의 방식도 점점 달라진다. 전에는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결정하던 집안의 

대소사를 이제는 자식들과 의논을 하게 된다. 신열이 녹아내린 듯 생각도 감정도 

느긋해지는 것 같다. 간혹 시끄럽게 사는 게 낯설게 느껴진다. 물안개 낀 날씨처

럼 나 혼자 고요 속에 묻힌 탓이다.

  계절을 보내거나 맞이하거나 그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며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떠날 때를 아는 아름다움도 배우고 오는 이를 맞이하는 설렘도 배운다. 

되풀이 되는 일상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변모하고 변화하는 것처럼 내 생활도 

마음도 그렇게 변해간다.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외면하면서, 

곧잘 흥분하던 버릇도 사라진다. 이 또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스스로 외

로움을 터득해가는 증표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