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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임병문 |
날짜 : 10-03-22 13:42
조회 : 2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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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인데도 공원으로 가는 길목의 약수터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이어지는 설한으로 인적이 끊어진 탓이다. 고요한 약물터의 뜨락에는 어젯밤 내린 눈이 숫눈인 채 쌓여있다. 수줍게 다가서 가만히 눈을 밟아본다. 은밀한 그 느낌에 가슴이 설레인다.
설레는 가슴은 새 눈이고 숫눈이어서가 아니다. 이미 내려서 묵은 눈도 내게 새로운 느낌의 만남이면 그것은 가슴 떨리는 첫 만남이기 때문이다. 밟는 나도 품어주는 눈도 서로의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득 나목(裸木)에 앉은 새 한 마리가 자리를 박차고 난다. 새가 떠난 가지 끝의 눈은 분분히 흩어져 내리고, 거기에 붉은 꽃 한 송이가 피어있다. 괴괴한 마당 한 켠에 그림처럼 피어난 선홍빛의 알 수 없는 꽃이다. 고결한 듯 그윽하고 미혹한 자색이 꽃 속에 기품으로 서려있다.
아! 그것은 붉게 핀 매화였다. 좀체 볼 수 없는 한 떨기 설중매인 것이다. 생각에 잠긴다. 숫눈과 홍매화, 그리고 나, 서로가 범상치 않은 인연이 되었다. 연(緣)이란 본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이 녹고 꽃이 지고, 발길을 돌리면 우리의 만남은 헤어짐이 되고, 맺은 연은 끝이 날것이다. 그 끝난 인연은 이별의 아픔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긴 그리움이 될 수도 있다.
내게는 일찍이 그런 그리운 사람이 있었다. 선연히 떠오르는 그 봄 날, 오늘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나와 인연이 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내게 붉은 매화처럼 찬연히 다가와 선홍빛 그리움만 남기고 에둘러간 사람이다.
내 나이 열세 살, 그때의 봄날은 참으로 외로웠던 시절이었다. 막 시골에서 도회로 이사를 온 나는 갈 곳도 친구도 없었다. 그날도 나는 혼자서 공원 옆 뒷산에 올랐다가 나쁜 사람을 만나 도망을 치게 되었다. 넘어지고 구르며, 어른들이 보이는 산 아래 활터에 와서 기진해 쓰러지고 말았다. 옷은 찢어지고 팔다리에 피가 낭자했다. 쫓아오던 낯선 형들은 보이지 않았고, 피 묻은 내 손에는 뺏기지 않은 하모니카가 꼭 쥐어져있었다.
그런 내게 한 여인이 다가왔다. 그는 나를 부축하고 집에 들어가 뒤란의 우물가에 앉혔다. 그리고는 피를 씻어내고, 찬물로 얼굴을 식혀 주었다. 놀라서 몸을 떠는 나를 여인은 가만히 안아주었다. 왠지 눈물이 났고 여인에게서 지분냄새가 났다. 밤꽃 향처럼 그윽하게 났다.
그날 이후, 여인은 내게 운명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모르는 여인에게 얼굴을 붉히며 처음으로 누나라고, 수줍게 불러본 날이 그날이기 때문이다. 그 외로웠던 어린시절 밤잠을 설치게 했던 그 첫 정(情)의 소리, 바로 누나였다.
그날 나를 데리고 들어가 피를 씻어 주고 약을 발라 주었던 활터 아래 그 큰 기와집에서 누나는 살았다. 사람들이 그 집을 화류(花柳)집이라 부르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들었고, 비로소 그 예쁜 누나가 어쩌면 기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혼자서만 하게 되었다.
진달래가 무더기무더기 흐드러지던 어느 봄 날, 나는 누나를 찾아갔다가 그 화류집 담장아래서 누나의 낭랑한 노래 가락을 처음으로 들었다. 숨이 막히도록 그 소리가 좋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알 수 없는 그 가야금의 소리는 내 어린 가슴에 누나를 그만 대못질러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누나를 따라 뒷산에 올랐다. 아! 산은 두견 빛으로 무리무리 발갛게 익어가고, 흐드러진 진달래는 만산에 꽃 세상을 펼쳐내고 있었다. 누나는 절로 노래를 불렀다.
‘바위 고개 피인 꽃 / 진달래꽃은 / 우리 임이 즐겨 즐겨 꺾어 주던 꽃 /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노래가 끊어졌다. 누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그 하늘 아래 고향집이 있다고 했다.
이런 누나와의 꿈같은 시절이 봄을 지나 겨울로 가고 있던 어느 날 누나는 내게 말했다. 이제 찾아와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누나가 밤을 새워 뜬 장갑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생이 되면 그때 나를 다시 찾겠다며 누나는 내 주소를 적었다. 그것이 이별이었다.
누나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때 누나는 왜 나를 안고 울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누나는 정이 많고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뿐이다. 그런 누나를 향한 내 속절없는 그리움은 내 생에 긴 이별의 아픔이 되었다.
이별의 슬픔과 고통, 언뜻 아홉 달의 짧은 인연 끝에 헤어져 평생을 서로 그리다가 끝내 세상을 등진 퇴계와 기생 두향(杜香)의 애절한 사연이 떠오른다. 매화시첩(梅花詩帖)에 퇴계는 두향을 향한 그리움을 이같은 시로 남겼다.
‘이별은 소리조차 나지 않고 /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어라 / 서로 한번 보고 웃는 것 /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 봄날은 다 가려 하는구나.’
퇴계는 죽는 날 아침 두향이 보내온 분매(盆梅)를 바라보며 ‘매화에 물을 주어라’ 하는 말을 남기고 오후에 숨을 거두었다. 죽는 그날까지 두향을 못잊어한 것이다. 두향은 퇴계가 죽자 단양 땅 남한강에 스스로 몸을 던져 정인(情人)곁으로 갔다.
사무쳐 잊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 어쩌면 그것은 삶의 업(業)인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욕망의 업일지도 모른다. 그 처절한 그리움의 고통, 정녕 어찌해야만 하는가.
누나가 세상 어디에서 나를 아직 생각하고 있다면, 누나는 이런 내게 무어라 말을 했을까. 사람의 인연이란 본디 그런 것이니 이제 그만 잊어라 잊어라 말을 했을까.
겨울 공원의 동상으로 서있는 퇴계는 눈 속의 매화를 바라보며 아직도 두향을 그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도 누나처럼 이제 그만 잊어라 잊어라 두향에게 그리 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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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10-03-22 2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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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가슴은 늘 감성의 물결이 출렁이는 것일까요.
아득히 멀어져가는 추억의 삽화를 떠올리게 하는 애잔한 작품 잘 읽었습니다. 잠시 감성의 산책길을 걸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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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3-23 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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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명화 선생님,
항시 관심 가져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글 잘읽었습니다. 그 글읽고 다시 제 글에 답글 적어 보냄이 마치
옛 선비들의 상춘모임에 술을 건네 답글을 대신하는, 화답주가 생각납니다.
이 봄, 어디 그런 자리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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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0-03-23 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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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달라도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조숙했다고 할까요. 아름다운 추억 한 편 간직하고 계신 임선생님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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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3-23 1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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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택 선생님,
졸작을 읽어주시고.
더구나 옛일까지도 공유 공감하시니
저로서는 큰 영광입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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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0-03-23 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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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찡하게 울려옵니다. 어쩌면 그렇게 아름답고 애닮은 전설 같은 추억을 고이 간직하고 또 그렇게 아름답게 펼쳐 보이시는지요. 이봄 저도 머언 옛날을 그립게 합니다. 그리고 홀로 가슴 저미게 합니다.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임병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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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3-23 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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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이렇게 글로나마 인사올림을 큰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연배로 보아서 홀로 가슴저미는 그런 때요, 그런 세월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술익어가 듯 글도 익고 사람또한 그리 익어가는 것같습니다.
항시 건강하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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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0-03-23 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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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지붕 위에 어제 내린 눈이 속절없이 봄 햇살에 녹아내리며
이별의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습니다.
금년 겨울은 왜 이리 미련을 못 버리고 머물고 있는지요.
오히려 그 덕분에 우리는 설중매를 한 번 더 볼수 있어 기쁨이 됩니다.
어쩌면 이리 애틋한 글을 쓰시는지요.
좋은 글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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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3-23 1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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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희 선생님,
거듭해주시는 선생님의 격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를 대신하는 것이 글이라는 생각에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미련을 버리고 돌아서야 하는 것 조차도 세월이 지나면 그것은
다시 만각으로 남아, 우리는 항시 그 미련 속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복희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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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재준 |
10-03-23 1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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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생의 글을 읽는 동안 황순원의 소나기가 생각납니다.
순진한 시골 소년이 병약한 서울 소녀를 만나 순진무구한 첫사랑을 하던 중에 소녀가 또 다시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헤어져야만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그려 놓았습니다. 본 수필에서도 이를 재연이라도 하듯 참으로 애절한 추억입니다.
까마득한 세월이라 뇌리에서 완전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사연들이 어느 계기에 이르면 살며시 피어오른 것을 붙잡아 이처럼 생동하는 작품으로 화한다는 것은 오직 작가의 역량이라 하겠습니다. 부티 문운이 창대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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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3-23 2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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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준 선생님,
졸작을 읽어주시고 더불어 과분한 말씀까지 해주시니
저로서는 더없는 영광입니다. 격려의 말씀 깊이 새겨서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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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3-24 2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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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어느 소설가의 <분이누님>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그리 좋은 분을 만났다는 게 이처럼 좋은 글의 자양분이 되었군요.
무엇하나 그냥 흘려보낼 수 없도록 작가에겐 모두 소중한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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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3-25 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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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희 선생님,
봄비가 내리고 있네요. 춘삼월 그 아까운 봄 날에 비따라 눈따라 자꾸만 봄은 가고 있네요.
어쩌면 그것은 선생님이 구상하시는 한 작품을 위해 '유불선'을 아우러야하는 산고가, 비되고 눈되어 내리는 것은 아닐런지요. 자료를 찾아 만나시고, 마음에 담아 섭렵하시고, 다시 가다듬어 써야하는 그 험난한 창작의 고통이 선생님의 봄날에 그리 내리는 것은 아닐까요.
다 이겨내시고, 좋은 작품나오기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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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0-03-25 1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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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하신 추억을 간직하고 계시니 슬그머니 부럽기도 합니다.
'누나'라는 말에는 포용과 용서가 배어있는 듯하고
그 속에서 금방이라도 '그리운 사랑'이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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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3-25 1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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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순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리움과 기다림에는 포용과 용서와 배려가 배어 있을 것입니다.
안팍은 언제나 서로가 등을 지고 있지만, 그것은 포용과 배려가 아니면 서로가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깊은 사유를 품고 읽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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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0-03-27 2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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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매로 기억되는 여성이 어린 소년의 가슴에 맑은 감성의 우물을 파놓고 떠났군요.
그래도 그 만남이 생명력이 있기에 오늘 문학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 믿습니다.
소가 풀을 먹고 되새김질하여 우유를 만들듯이 글쓰는 이들에게는 모든 추억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자양분이 되는 것일 테지요.
가지마다 꽃눈이 움트는 춘분과 청명 사이, 늘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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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3-29 1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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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화 선생님,
제가 글을 쓰는 마음과 사유들은 선생님의 말씀처럼 깊은 곳 감성의 우물에서 샘솟아
고인 물을 퍼 올리고, 소가 우유를 만들 듯 풀을 새김질하면서 그것이 문학이고자 절실히
노력하는, 그것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읽어주시고, 지적해주시고,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청명, 그 말씀처럼 항시 푸르고 맑게 그리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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