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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09-12-24 08:59
조회 :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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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낭팔이 소녀..., 그레트헨
잘 알려진 안델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을 팔아 연명하는 소녀가 어느 크리스마스 무렵 가족들이 단란하게 모여 앉은 집 처마 밑에서 외롭게 숨을 거둔다는 내용입니다. 이 동화는 '더불어 사는 이웃'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찰케 합니다. 우리만 행복하게 잘 살면 그걸로 되는 것인지. 사회의 무관심에 우리의 책임은 없는지. '성냥팔이 소녀' 만큼 울림이 크진 않지만, 제게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 1973년, 겨울.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는 세밑. 해질 녘 명동 입구 훈목(薰沐)다방 옆에 있는 안경점을 찾은 것은, 안경다리가 귀를 누르는 바람에 상처가 나 고쳐 쓰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학, 이듬 해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요. 군 수용연대에서 대충 만들어준 안경인지라 도수가 맞지 않았지만, 억지로 '눈을 안경에 맞추다' 보니 이럭저럭 견딜 만 해 내처 쓰고 다녔습니다. 훈련소에서 낮은포복 높은포복 하느라 먼지 때가 견고하게 낀 낡은 안경은 초라한 제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이었습니다. 한번 길이든 안경을 어떤 이유에서든 새것으로 교체한다는 것은 사치였습니다. 그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주인아저씨가 내키지 않는 손놀림으로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며 앉아 있었는데, 웬 여자가 들어섰습니다. 아저씨와는 구면인 듯 인사를 나누는 등 익숙한 분위기였어요. 전 여자를 본 순간 숨이 턱 막혔고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지금까지 보아온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 더 아름다웠지요. 용모가 청순할 뿐 아니라 주위를 은은한 빛이 감싸고돌아 성(聖)처녀를 보는듯 했습니다. 비슷한 사람을 그려보았는데 마땅한 사람이 당장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러다 문득 그레트헨을 생각게 되었습니다. 전 자신도 모르게 파우스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을 암송하였지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천사들의 합창이 장엄히 울려 퍼지고, 마음속에 내밀한 기쁨과 경건함이 차올랐습니다. 그녀라면 안경처럼 허접하고 비루한 내 영혼을 높은 곳으로 인도하리라!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고 친척 아저씨로 보이는 일행이 있었어요. 그녀는 선글라스를 사려는 듯 쇼윈도 속의 안경테를 이것저것 꺼내 써보곤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동행한 남자에게 조언을 구하려는 듯 얼굴을 반쯤 돌리며 멋지게 포즈를 취하였습니다. 스포츠머리를 한 초로의 사내는 손에 다이아로 보이는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들어 호(好)‧불호(不好)를 표시하였지요. 어색한 커플의 무언극은 음이 소거된 화면을 보듯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그녀가 안경 하나를 골랐고, 남자는 흡족한 듯 웃었는데, 잠깐 금이빨이 보이더군요. 주인아저씨가 수신호로 가격을 말하자 남자가 지불 하였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안경점을 떠나갔지요. 그들이 나가자 문을 통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이 밀어 닥쳤고…. 전 한바탕 헛된 꿈을 꾸었거나 미(美)의 정령(精靈)에 사로잡혔던 것 같았습니다. 얼핏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수습하려 애쓰며 제 생각이 틀렸기만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안경 수리를 끝낸 주인아저씨가 말하더군요... "남자가 일본 사람이에요!"
안경점을 나서니 코끝이 맵싸했습니다. 거리는 사람의 물결이었습니다. 한 켠에 검은 제복을 입은 구세군이 종을 치고 있었고, 레코드 가게에서는 성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지요. "온 세상아 주님을 찬양하라." 사람들은 코트 깃에 목을 파 뭍은 채 달력을 몇 개씩 말아 쥐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더군요. 전 그날 밤 안경을 부셔져라 움켜쥐고 설움에 목이 메어 찬바람 도는 명동거리를 헤매었습니다. 안경점에서 만난 여인으로부터 언감생심 '영혼의 구원'을 감지하였으나, 시린 현실은 그녀가 세속에 물든, 손가락질 받는 대상임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그녀로 인해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빈한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지금에사 그 때를 회상해보니,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가난하고 되는 일 없던 한 청년의 좌절과 무력감만이 아닌, '시대의 아픔'과도 맥이 닿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모했던 여자들을 무색케 했던 대단한 미모의 그녀가 우리 사회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저는 또 다른 갈등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안경점에서 만난 여인과 남자의 묘사' 는 저의 신인상 수상 수필인
'안경점의 그레트 헨' (한국수필, 2008. 12) 내용을 축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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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09-12-25 1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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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훈목 다방은 저도 가본 일이 있었지요. 미팅을 하느라, 후후...
그 청순한 구원의 여인이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대변하는 존재였다니,
다시 읽어도 마음이 서늘해지네요.
따스한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내며
행복한 연말연시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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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12-25 1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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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화 선생님, 오래 못 뵈었군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
즐거운 성탄 맞으세요...! Feliz Navid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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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09-12-26 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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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를 읽고 청순 가련한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여인상에 대해 한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허무한 꿈의 조각이 아닌지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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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12-27 1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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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전 아직도 '구원의 여신'이 어딘가 있으리라고 믿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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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09-12-26 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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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당시 말씀한대로 서독광부 간호사, 일본인 콜걸등
시대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콜걸들은 주로 회현동쪽에 많이 살고 있었는데
정말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우째 보면 겉모양만 그렇다고도)
여자들이 꽤나 많았습니다. 저도 그런 여자들을 볼때마다
일본놈들이 죽도록 미웠으니까요.
콜걸들만 그랬나요, 그당시;는 무교동 다동쪽이었는데
술집 아가씨들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콜걸이나 술집색씨들은 얼굴만 청순한 가면을
썼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서독 간호사에대해서는
시대의 아픔을 붙일수 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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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12-27 1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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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철 선생님 말씀을 듣고 그때를 다시 회상해보니,
안경점을 나서며 까닭모를 울분도 느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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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12-26 1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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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선생님은 그리움을 많이 안고 사는것 같군요.
훈목다방이라, 이름이 멋있습니다.
금년 열심히 활동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도 건강하시고 하시고자 하는 일 이루시는
한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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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12-27 1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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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회장님, 올 한 해 베풀어 주신 관심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잘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댁내 평안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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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09-12-27 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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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에 무언가 생각을 일으켜주는 글 내용에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좋은 일만 거듭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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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12-27 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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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보 선생님, 만감이 교차하는 세밑에 혹 마음을 무겁게 해드리지 않았나 저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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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09-12-28 1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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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선생님! 전 아직도 김선생님이 고생하며 자란 저희 세대가 아니라는 느낌이 드네요.ㅎ
글을 읽어보면 맞는데....
하지만 글을 쓰시는 감성도 역시 만년 소년이신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새해에도 행복한 일만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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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12-28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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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직 철이 덜들었단 소린 종종 듣습니다만...^^
새해 댁내 평안과 문운을 기원합니다, 최복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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