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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최원현 |
날짜 : 12-11-28 15:03
조회 :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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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최원현
nulsaem@hanmail.net
그 아이 별명은 어처구니다. 내가 붙여준 것이다. 그가 다섯 살쯤이었을까. 무심코 지나는데 ‘어처구니없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만 하나 서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런 말을 쓸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에도 나이답지 않게 워낙 말을 잘 하던 아이인 것을 알던 터라 “네가 그랬니? 어처구니라고?” 하니 그냥 말똥말똥 쳐다보기만 했다.
“너, 어처구니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니?” 내가 다시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어렵고도 생소할 말이다.
어처구니란 ‘없다’와 함께 쓰이면서 아주 뜻밖이거나 한심해서 기가 막힘을 이르는 말이다. 하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해 기가 막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고 할 때와 같은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아이는 분명 아주 천연덕스럽게 ‘어처구니없어’라고 했다. 어떤 일을 보았기에, 무엇이 그 아이를 어처구니없게 했을까. 여하튼 나는 그때부터 그 아이를 어처구니란 별명으로 불렀다.
어처구니란 말을 떠올리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어린 날, 그 날도 할머닌 나를 불러 맷돌질을 하자 하셨다. 할머니는 가끔씩 다른 손으로 돌아가는 맷돌의 입에 콩을 한 줌씩 넣곤 하셨다. 나는 돌리는 것보다 그렇게 구멍에 콩을 집어넣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도 하겠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해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눈으로 볼 때처럼 쉽지가 않았다. 돌아가는 맷돌의 입에 제대로 맞춰 넣는 것도 어려웠지만 손잡이에 부딪혀 하마터면 손을 크게 다칠 번했다. 손에 쥐었던 콩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콩 넣기를 포기하자 맷돌을 더 빨리 돌려보고 싶어졌다. 해서 속도를 높이고자 한껏 힘을 주자 손잡이를 잡은 할머니와의 박자가 깨어지면서 손잡이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툭 빠져버렸다. 빠진 것을 다시 끼워봤지만 한 번 돌리자 힘없이 다시 빠져버렸다. 어떻게 해 볼 수 없이 결국 외출하신 할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맷돌 손잡이를 어처구니라 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쯧쯧 혀를 차시며 나를 나무라셨다. ‘사람이 좀 진득해라. 서둘러선 아무 일도 못 한다.’ 할머니는 빠진 어처구니를 만지며 ‘하기야 몇 년이냐. 내가 시집오기도 전부터 쓰던 것이니 참으로 오랜 세월을 잘도 버텨주었구나’ 혼잣말을 하셨다. 어처구니가 빠져버린 맷돌은 맷돌일 수 없었다.
어쩌면 세상을 움직이는 힘도 어처구니 같은 데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작은 힘으로부터 나오는 큰 힘이 제대로 된 힘이 아닐까. 그런데 그때 아이는 무슨 일을 보았기에 어처구니없다 했을까 새삼 궁금해진다. 아이의 눈에 보인 어처구니없는 일, 아이가 보기에 어처구니없는 세상이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나도 이 나이 되도록 살아오면서 어처구니도 없이 맷돌을 돌리려 한 건 없었을까. 잘 돌아가는 맷돌의 어처구니를 빼버려 할머니를 난감하게 만들던 나, 순리를 무시하고 내 억지, 내 고집을 부려 어처구니를 빼버린 적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어처구니란 별명을 갖게 되었던 아이도 어느덧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를 볼 때마다 그때의 ‘어처구니없어’가 생각나며 다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마구 일어난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가 보았던 어른들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잊을 만한데 다시 일깨워 주는 일이 될까봐 입을 다물고 만다.
어처구니를 빼버린 내 방정 때문에 혀를 차던 할머니의 ‘사람이 좀 진득해라. 서둘러선 아무 일도 못 한다’는 말씀이 이명처럼 귀를 울린다. 내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더 오래도록 아무 문제없이 썼을 할머니의 맷돌 어처구니처럼 나도 삶을 보다 잘 건사할 순 없을까. 오늘에 이르러서도 할머니의 손에 든든한 어처구니로 박혀있는 손자의 모습이지 못한 것 같아 나도 몰래 얼굴이 붉어진다. 거기에 그거 보라는 듯 아이의 ‘어처구니없어’ 소리가 겹쳐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해 봐도 나란 인간은 참 어처구니없는 것 같다. 이 나이가 되었는데도 몫도 자리도 제대로 지킨 게 없으니 말이다.
월간 <한국산문> 2012년 11월호
최원현 www.essaykorea.net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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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2-11-28 1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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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어처구니' 하면 지금 까지 '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 또는 '일이 너무 뜻 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의 뜻만 알았는데, 맷돌을 손으로 돌릴 때 쓰는 나무 조각이었습니다. 한옥에서 용마루 끝과 처마 끝에 마무리하는 십장생 동물형상도 '어처구니'라고 하더군요! 좋은글 잘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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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2-11-29 0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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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어처구니 없는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반성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처구니없지 않도록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원현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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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2-11-29 1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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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현 선생님, 문득 콩을 갈아 콩비지 해먹고, 녹두를 갈아 녹두전을 해먹던 아날로그의 날들이 그리워집니다. 아무리 최신 도구로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갈아도 맷돌의 맛이 나지 않아요.
때로는 어처구니가 빠진 줄도 모르고 맷돌을 돌리려 했던 무모함으로 힘들었던 시간들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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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
12-11-29 1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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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섭. 임재문. 이진화 선생님 고맙습니다. 우리 말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뜻을 품고 있어 새겨보면 참 재미있는 말들이 많더군요. 그 뜻 하나하나가 사실은 다 글감인데 그걸 제대로 못 써먹는 저희가 안타깝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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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2-11-30 2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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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나 어머니와 함께 맷돌 앞에 마주앉아 어처구니 아래 위를 잡아쥐고 맷돌을 돌려보신 분은
맷돌질이 보기보다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걸 잘 아십니다^^
선생님의 옥고를 감상하다가 베란다에 나가 예전에 어머니가 쓰시던 맷돌과 그 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낡은 어처구니를 내려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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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월 |
12-12-05 2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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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란 말이 멧돌의 손잡이란 사실에서 그런 어원이 생겨났군요.
누구나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나요?
그냥 반성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이 아닐까요.
앞으로라도 누구에겐가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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