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느라고 걷기 운동도 못해?
호수공원 가깝잖아?
00도서관 뒷 숲 산책로가 그만이에요.
올 여름 나는 서울에서 이사와 7,8년이나 발붙이고 살아온 이 동네 일대를 애정을 가지고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살고 있는 동네에 애정을 가질만큼 새삼 무슨 여유나 한가로움 같은 감정은 아닌 게 분명한데 나는 지금 그렇게라도 내 감정에 포장을 해야할 필요를 느낀 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다닌 병원, 함께 어울리던 학부형 친구들, 늘 오르던 구청 뒷산, 한여름이면 피서겸하여 안방처럼 드나들던 H 백화점 등에 길들여진 탓으로 간단한 은행 볼일에서부터 병원, 시장보기 등을 항상 서울 서부권을 중심으로 해왔다.
그곳에 가면 반겨주는 친구가 있어 밤이 이슥하도록 아이들 이야기 건강 이야기 주고 받을 수 있고, 줄장미 넝쿨이 늘어지고 활짝 번 목련꽃이 우아하던 그 골목의 옛 정취를 회상할 수 있어 좋았다.
갓 시집온 어린 신부처럼 아시시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를 선두로 매혹적인 향기를 인근 각처에 무차별로 풀어놓는 라일락, 달이 떠오를 즈음하여 수줍게 피어나는 하양 노랑 꽃분홍의 분꽃이며, 촌스럽지만 꺼릴 게 없다는 듯 당당한 과꽃과 쬐끄만 것이 몸체는 튼실해 보이는 겹채송화, 열매 보다는 잎새와 줄기가 더 푸짐했던 포도나무며, 먼 데가서 얻어다 심은 피마자의 쩍 벌어진 모양새, 글라지오라스의 품격과 홍초의 샛빨간 정열, 달리아 꽃의 풍성함이라니.
작은 면적이라 큰 과실수나 다년생 화초를 가꿀 터전은 못되었지만 인연 닿는대로 심어 놓은 꽃나무들이 제 시절을 알아 싹트고 꽃피는 정경을 바라보는 재미는 아파트의 짜맞춘 공간에서는 만나기 힘든 일이 아니던가.
그리움과 아쉬움. 화단과 텃밭을 가꾸며 살고 싶은 장차의 꿈을 확인하기 위해서일까. 내 발걸음은 인터넷에도 멋지게 뜬다는 호수공원 대신, 집 근처의 00도서관 산책로를 걷기 보다는 시간만 나면 서울로 서울로, 내가 살던 동네로 달려가곤 하였다.
그것이 중단된 건 전혀 엉뚱한 사태 발생 때문이었다. 15여년 이상 외국생활이 몸에 밴 큰아들 가족, 손녀손자의 출현은 나의 일상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발랄, 깜찍,용감한 그들은 내가 애용해 마지 않는 P C 라고 가만두지 않았다. 반드시 정확한 책임소재를 밝힐 수는 없겠지만 사건 발단 시점이 그들의 귀국 시기와 일치하고 있었다.
3년여 동안 작업해온 논문자료가, 문학작품이, 하드가 망가지면서 공중으로 날라가버린 사건이 그것이다. 왜 저장도 않해 놓았어? 라고 묻는다면 물론 일차적인 잘못은 나에게 있다. 주야 불문하고 진행에만 몰두했지, 태평양을 건너온, 성격이나 외모가 완전 글로벌化한 아이들에게 무참하게 기계가 결단날 수 있다는 것은 미쳐 예상을 못했다.
그 이후 주인 잃은 개가 수년 동안이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주인과 헤어진 길목을 지키듯 멀리 나들이는 커녕 호수공원의 낭만도 머리 속으로나 그리면서 P C 앞을 떠나지 못하고 애만 태웠다. 서비스맨을 불러보고, 컴 회사에 문의도 해보고,망가진 하드를 싸들고 전문업체 방문도 해보고 하였으나 별무효과였다.
버리지도 못하고 활용도 못하는 하드를 설합에 모셔놓고서 한가로히 공원을 거닐 마음이 아니었다.
가을이 왔으니 이젠 결심을 해도 좋으리라. 끊어진 기억을 더듬어 새로히 작업을 재개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그보다 더 중한 것도 잃고 사는데 까짓게 문제랴 싶을 만큼 한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다. 이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도 세월이 가면 그저 그런 것으로 변하는 게 자연이치 아닐까. 주인잃은 개가 소방대원들과 선량한 주민들의 도움으로 새 보금자리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P C 앞에서 호수공원의 수련을 떠올린다. 비단잉어가 물살을 헤집고 다니든 말든 고요와 평정을 유지하는 아름다운 꽃. 혹독한 여름을 이기고 말없이 피어난 수련의 자태를 나 한 번 닮아 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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