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원명화
무언가 축복이라도 받은 듯 뿌듯한 느낌이었다.극장에서도 몇 번이나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만난남자와 단 둘이 앉아 영화를 관람한다는 게 조금은 어색했지만 영화를 보는 기대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극장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어두웠고 객석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이 관객들로 가득 찼다.
불이 꺼지자 대한뉴스가 우렁차게 흘러 나왔다. 곧이어 몇 편인가의 예고편이 나오고 본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웅성거리던 소음은 완전히 뚝 끊기고 관객의 시선은 모두 화면으로 집중되었다.
어머니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나간 맞선자리였다. 우리 쪽에서는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나, 그쪽에서는 외숙모, 그가 나왔다. 그에게는 외숙모였지만 내게는 이종언니가 되는, 굳이 촌수로 따지자면 그와 나는 사돈에 팔촌쯤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신 뒤,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나가고 우리 둘만 남았다. 차는 이미 마신 터라 찻잔은 비었고,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애써 감추기 위해 죄 없는 엽차만 홀짝홀짝 마셔댔다.
들어올 때부터 흘러나오던 팝송 (you mean everything to me/닐 세다카)이 사라지고 귀에 익은 우리노래「커피 한 잔」이 흘러 나왔다. 그때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우리 곁을 지나던 레지가 엽차 잔을 힐긋 보더니 “엽차 더 드려요”했다. 그러자 그는 하고 싶던 말을 뱉어내듯 “우리 영화 보러 갈 건데요”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나도 엉겁결에 그를 따라 무턱대고 나섰다. 아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자석에 끌리듯 금호동에서 버스를 타고 을지로에서 내려 명보극장까지 걸었다. 다방에서는 말 한 마디도 없던 그가 붙어있던 입이 떨어진 것인지 취미, 가족상황, 직장 등등의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며 마치 오래 된 연인처럼 굴었다. 나는 한껏 멋을 내느라 하이힐을 신고 나온 게 후회되었다. 발가락이 짓물렀는지 몹시 아팠다.
그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참고 영화관 앞에 도착해보니 표가 매진되고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나도 모르게 절로 한 숨이 나왔다. 그의 표정도 난감한 듯 보였다.
“혹시 영화 보러 온 것 아니세요. 친구와 같이 보려고 산건데요, 급한 볼일이 있어 표를 팔고 싶은데, 사실래요?” 이런 행운도 있을까, 마치 짜인 각본처럼 우리는 영화표를 구했고 땅콩과 오징어다리까지 사들고 영화를 보러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 ‘조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원제는 Somethingfor Joy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아파다비에 살고 있는 가펠레티 일가는 평범하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불행은 몰래 숨어 있다 호시탐탐 노리는 악마처럼, 어느 날 평화로운 가펠레티 집안으로 침입하면서 영화는 슬픔의 늪으로 빠져들어 간다. 막내아들 조이가 백혈병으로 몇 달밖에 못산다는 선고가 떨어지고, 그 모진 절망을 이겨내기 위한 따뜻한 가족애의 사랑은 감동 그 이상이었다. 가족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조이의 병은 날로 악화되어간다. 미식 축구선수인 형의 시합을 앞두고 승리를 목말라 하는 동생조이, 기쁨을 안겨주기 위해 투혼을 불사른 형의 눈물겨운 승리를 보며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안았다. 전 미국 미식축구계 최고상인 하이즈먼 트로피수상식에서 형의 연설은 눈물겹다 못해 관객 모두를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조이가 몇 달밖에 못산다는 선고가 떨어지는 장면부터 시작해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말없이 내민 손수건을 엉겁결에 받아들고 눈물에 콧물까지, 흥건하게 적셨다.
픽션이 아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 감동이 2배로 전해오기도 했지만 내게는 현실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10년 전, 죽은 내 언니의 존재가 오버랩 되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언니는 방송국어린이 합창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게 늘 부러웠다. 틈만 나면 언니를 졸라 노래를 배웠고, 우리는 둘이서 곧잘 화음을 맞춰 부르곤 했다. 투정을 부려도 한 번도 귀찮다 않고 언제나 나를 귀여운 동생으로 봐주던 언니였다. 그런 언니에게 찾아든 병마는 평화롭던 우리 집안을 혼동의 수렁으로 몰아갔다. 골수암으로 시한부인생이 되어버린 언니는 병상에서도 내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 보답이라도 하듯 나 역시 합창단선발 대회에 합격하여 당당한 단원이 되었다. 그 기쁨을 보지도 못한 채 그해 가을, 언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가고 말았다.
어쩌면 내 안의 설음이 겹쳐 더 많이 눈물을 쏟아낸 건지도 모른다. 그 바람이 엉망이 되어버린 손수건, 그 손수건을 건네주기 위해 나는 그를 다시 만나야 했다. 만나서는 언니 이야기와 영화이야기에 빠져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그게 인연이 되어 마침내 우리는 웨딩마치를 울렸다.
되돌아보면 사랑한다는 말보다 영화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영화 얘기를 나누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인생 반년이다. 지지고 볶고 사는 동안 감성은 찌들어 말라빠진 장아찌가 되었고 세월은 획획 지나가는 영화의 필름처럼 사라져갔다. 늘 겉으로는 행복한 듯 하여도 가슴에 찬바람이 파고드는 나이에 세삼 그때의 추억을 반추하는 즐거움에 젖어본다.
완연히 식어버린 가슴이 또 다시 출렁댄다. 이 달콤한 음모의 실체는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