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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희순 |
날짜 : 12-03-30 10:54
조회 : 2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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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는 깔깔한 목청을 높여 짤막하게 울었다. 녀석은 내 차가 농장에 오는 기미를 알아채고 마중이라도 나온 듯, 농장 들머리의 뙈기밭에서 서성거리곤 했다. 내 차가 2,3미터 거리에 멈춰서도 도망치려는 시늉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이 일대가 녀석의 영지인 듯하였다. 나는 장끼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를 입증이라도 하듯 ‘꿩꿩 운다고 꿩이냐.’ 하였다.
농장 뒤편의 참죽나무에 거름을 하고 있는데 개들이 몸을 솟구치며 난리를 치고 석 달 강아지들마저 덩달아 농장 앞마당으로 다가서며 짖는 품이 무슨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난데없는 장끼 한 마리가 현관 앞에 엎어져 있었다. 바닥에 엎어져 그대로 죽어버렸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불안을 억눌러 손끝으로 슬쩍 건드리며 눈을 떠 봐라 소리를 질러도 반응이 없다. 바로 곁에 있는 큰 물통에서 찬물을 떠서 녀석의 몸에 끼얹어도 소용이 없었다. 밀렵꾼이 놓아둔 ‘꿩약’을 주워 먹은 게 틀림없었다. 콩알 속을 알맞게 파내 청산가리를 넣곤 촛농으로 때워 위장한 ‘꿩약’을 먹으면 영락없이 죽는다했다. 짐승이 문 앞에서 죽는다는 건 꺼림칙한 일이라 나는 두 손으로 재빨리 녀석의 몸을 움켜들었다. 그런데 아직도 숨이 붙어있었는지 뜻밖에 녀석의 몸은 따뜻했다. 농장 먼발치에 쌓아둔 비료포대 옆 양지에 녀석을 내려놓았다. 녀석은 숨을 쉴 여력도 없는지 간혹 눈꺼풀만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몸피를 가늠하면서 자두나무 근처에 구덩이를 파고 돌아와서 다시금 녀석을 툭툭 치며 사정을 했다.
“정신을 차려 봐, 이대로 묻힐 거냐.”
그때였다. 녀석은 마치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나는 비료더미 위에 사각의 공간을 만들어 녀석을 안치했다. 땅에 묻더라도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는 기다려주기로 한다했지만 속으로는 ‘살아나라.’를 연호하고 있었다.
녀석이 살아났다. 비료더미 성루에서 눈을 들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아 녀석의 지척에서 연거푸 핸드폰의 카메라 셔터를 더듬었다. 어린 시절부터 장끼를 보아왔지만 두 눈 멀뚱한 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면한 적은 없었다. 나는 녀석의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에 탄복하며 넋을 잃었다. 꽃은 노랗고 그 씨는 검으며, 잎은 푸르고 줄기는 붉으며 뿌리는 하얗다하여 쇠비름을 ‘오행초’라고 부른다. 적청황백흑의 오방색 즉 오행을 갖추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장끼의 오방색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정수리에 이고 있는 한 점 흰 구름에 아침 햇살이 비쳐 은빛 광채가 어린 가운데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에워싸고 있는 붉은 볏은 너무나 강렬하여 까투리들의 애간장을 녹여버릴 듯하였다. 붉은 볏을 둘러싼 검은 깃털은 목덜미 쪽으로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푸른빛으로 변화하고 있어 영락없는 ‘수생목(水生木)’이었다. 목에는 새하얀 머플러를 둘러 심판자의 의기를 천하에 선포하였다. 노란 부리를 살짝 열고 먼 산을 바라보니 어김없는 ‘오행조(五行鳥)’였다. 순백의 목덜미를 경계로 등판의 절반을 수놓은 황금빛 의상은 금박을 정교하게 재단하여 일일이 이어붙인 듯 오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날갯죽지에서 익어가는 떡갈나무 열매와 등판 아래쪽에 아늑하게 가꾸어놓은 따스한 보금자리가 꺼병이의 재롱을 함께 보자며 까투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밝은 밤색 가슴은 용사의 갑옷이요, 여느 날짐승의 것보다 길고 곧은 꽁지깃은 문무겸전한 선비의 명예와 절개를 세상에 전하고 있었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장끼가 사라졌다. 얼마 후 녀석은 저 아래 골짜기 쪽에서 ‘꿩꿩’하고 울어서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녀석은 마당가에 매어둔 덩치 큰 진돗개가 졸고 있을 때 사료를 훔쳐 먹으려다 돌연한 개의 공격에 혼비백산하여 농장의 유리창에 부딪혀 기절했던 것일까. 매에게 쫓기다가 유리창을 들이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꿩이라는 족속은 죽자 살자 나는 솜씨가 기껏 둔중한 여객기의 이륙 수준인데다 비행거리도 초라하기 짝이 없어 ‘꿩꿩, 푸드득’에 50여 미터가 고작이다. 경위야 어떻든 제 발로 찾아들어 친절하게 졸도까지 해준 귀한 꿩의 고기 맛을 보지 못하고도 입가에 바보처럼 웃음이 번지니 내겐 숫보기 신세를 면할 재주가 없는성싶다.
그제 아침에 녀석은 제가 묻힐 뻔했던 구덩이 옆을 지나치며 빗속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어제는 처음 보는 까투리 네 마리와 한 데 어우러져 노닥거리고 있었다. 까투리들은 후사를 위해 신랑감의 됨됨이를 보러온 눈치였다. 오늘 녀석은 연분홍으로 물든 매실나무 밭을 가로지르다가 멈췄다. 나는 녀석을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상상에 잠겼다. 사람의 마음 밭에도 꽃밭이 있을 터이니 내 안에도 작은 꽃밭 하나 있을 것이다. 비록 미물에 지나지 않은 날짐승이지만, 한 생명을 살려 보낸다는 건 내 화원에 한 송이 꽃을 피우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 꽃은 다시 내 생명을 풍성하게 가꾸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저 꿩이 지금 어찌 우냐?”
“어머니도 참, ‘꿩꿩’하고 우니까 이름도 ‘꿩’이지요.”
어머니는 다시 꿩이 울 때를 기다리며 내 눈을 들여다보시다가
“또 울거든 잘 들어봐라. 꿩은 ‘끌끌’하고 운단다.”
나는 여태도 어머니 말을 인정한 적이 없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장끼는 분명 ‘끌끌’ 울고 있었다. 나는 꿩고기 대신 쑥국을 먹은 일손에 힘을 주었다. 봄이 이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아지랑 아지랑 내게 다가왔으니 올해에는 자꾸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가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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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2-03-30 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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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오방색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오방수필입니다.
'꿩꿩'이 아니라 '끌끌'이라고 꿩의 소리를 표현하신
어머님의 섬세한 감각과 총기가 선생님께 전해진 게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장끼의 수려한 자태를 보여주고 거듭난 꿩은 그후로
행복하게 살고 있겠죠.
저의 다락방 천창에도 가끔 꿩이 날아옵니다만 조촐한
모습의 까투리입니다.
매화향기가 그리운 새봄에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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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2-03-31 0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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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다락방에도 가끔 꿩이 날아드신다니 놀랍습니다.
두 눈 멀쩡한 녀석과 얼굴을 맞대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장끼의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를 마땅히 설명할 재주가 없어 사족을 그리고 말았습니다.
비가 개니 어느 결에 봄은 세상의 한가운데에 왔는가 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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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2-03-30 2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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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생활의 행복이 묻어나는 글입니다. 그리고 정감어린 시선을 미물에게까지 이어가시는 이희순 선생님 ! 그 역시 전원생활로 자연의 품에 안긴 덕분인가 합니다. 저도 그렇게 전원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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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2-03-31 0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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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생동하는 봄의 생명처럼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셨군요.
자주 들었으나 가보지는 못한 왕송호수의 봄이 궁금합니다.
사모님과 함께 소박하고 행복한 나날을 가꾸시는 선생님의 미소가
이곳 먼 남녘까지 그대로 전해오는 듯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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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2-03-31 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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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수필작가회 회원들은 어찌도 이리 글을 잘 쓰시는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오만가지 아름다운 이야기를 붙이다니, 그 글 재주가 부럽고 부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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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2-03-31 2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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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과찬에 와락 부끄러워져 글을 거두고 싶은 심정입니다.
선생님은 까마득한 후배에게, 사람이 연륜을 더해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행동으로 가르쳐주고 계시니 그 보다 더 값진 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건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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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2-03-31 1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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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일만 선생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미물과 어울려 사랑를 노래하니 낙원이 따로 없습네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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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2-03-31 2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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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린 선생님의 글을 몇 번을 읽었습니다.
그 마지막 장면은 아무리 보아도 감동스럽습니다.
늘 제 귀감이 되시는 원로 선생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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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2-04-01 0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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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러 좋은 글 읽었습니다.
수필 쓰는 것은 뒷전이고 영상뉴스 합네 하고
정신을 파느라 그랬습니다.
저도 어여 수필에 젖고 싶은데 멀리 나갔나 걱정이군요.
산책을 하며 꿩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마음을 편하게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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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2-04-01 1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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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실버들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시는 선생님의 왕성하신 체력과 열정을
저는 감히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전원 속에서 작은 새소리도 놓치지 않으시는 선생님의 자연사랑을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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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2-04-01 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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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생님, 저희 집 부근에도 가끔씩 궝이 보입니다. 고라니도 보이고요. 지난 여름에는 텃밭에 뱀도 보여서 우리 집 사람이 기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일상에 행복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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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2-04-01 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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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는 벌써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인데 선생님 계신 곳에선 자주 나타나는 걸로 미루어
그곳은 정말 때묻지 않은 심심산천인 듯합니다.
선생님이야말로 무위자연을 즐기고 계시니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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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2-04-02 1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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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등성이 너머에서 진종일 꺽꺽거리던 장끼의 울음소리, 아마 이맘때쯤의 추억일겁니다. 까투리와 장끼의 너무도 뚜렷한 구분, 선뜻 납득하지 못했던 그 기억의 시절이 아련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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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2-04-02 1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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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평안하신지요.
사람은 여성이 아름다운데, 짐승들은 암컷의 입성은 초라한 반면 수컷은
다들 체격도 늠름하고 대단한 멋쟁이들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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