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사방이 어둠이다. 아니다. 사위(四圍)를 구분할 수 없는 까망이다. 적막이다. 그야말로 고요다. 이런 고요 속에선 내 어떤 세미한 움직임조차도 파문이 일고 고요를 깨트릴 것이다. 숨을 쉬는 것, 그래 내 심장의 움직임 그 박동 소리까지도 고요의 적이다. 그러고 보면 어둠과 고요야말로 가장 완벽한 조화일 것 같다.

느낀다는 것은 보는 것보다도 훨씬 강하다. 보는 것은 눈과 뇌로 만도 가능하다. 그러나 느낌은 온 몸이다. 고요를 느낀다는 것도 결국 ‘나’라는 존재가 고요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물에 뜬 기름처럼 융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덩그마니 홀로 있는 현상이다.

아내와 하루 휴가를 나갔다. 잠깐이라도 하던 일들에서 벗어나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찾은 한적한 곳,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는 하루를 보내고 새로운 하루를 맞은 지 두어 시간 되었을까.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나를 숨겨본다. 그런데 잘 되질 않는다. 어둠의 색과 나, 밤의 고요와 나, 자연 속의 나는 좀처럼 온전한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 어디서건 내 형체, 내 실체가 드러나고 만다.

자연끼리는 쉽게 어둠과 동화(同化)되는데 사람은 그렇질 못한다. 이미 자연한 것들로부터 얼마큼 밀려나 퇴색되고 변색되고 변질까지 되었음이다.

나도 모르게 바깥으로 난 문을 열고 옥상으로 향한다. 발로 더듬어 오르는 계단은 시작도 끝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내 옥상에 이른 것을 감지한다. 몸을 한 바퀴 돌아봐도 시야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도 깜깜할 수 있구나. 가만히 서 있노라니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니 나를 부딪히며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눈을 한참동안 감고 있다가 아주 조금씩 떠 보았다. 역시 깜깜하다. 그런데 짙은 어둠 속에서 내 눈이 조금씩 어둠을 감지해 낸다. 눈이 먼저 적응을 하는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향해 본다.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만다. 바로 내 눈 위에 주먹만 한 별 하나가 떠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까지 별이 올 수 있단 말인가.

손으로 잡으면 잡힐 것 같은 거리다. 그러나 손을 뻗어보니 별은 여전히 그 거리다. 자세히 보니 조금 떨어져 또 하나의 별이 보인다. 그리고 또 있다. 그렇다면 저들은 언제부터 거기 있었단 말인가. 저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내가 어둠 속에 묻혀있는 동안에도 저들은 아까부터 거기 있었지만 내가 전혀 의식을 못 했을 것이고, 내 눈이 저들을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까만 비로드 천에 박힌 보석처럼 별이 빛난다. 그런데 왠지 슬퍼 보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충청도 산골에 사는 ㄱ 작가가 하룻밤을 지내며 별들을 만나보라던 얘기가 생각난다. 잡힐 듯 와있는 별을 보라 했다. 그 곳 별은 유난히 커 보인다 했다. 아주 가까이 와 있기 때문이란다.

지금 내가 그의 말을 실감한다. 커다란 별은 내게 여전히 할 말 있음의 표정이다. 눈을 깜박이며 알아듣겠느냐고 하는 것 같다. 그가 내게 하고자 하는 말, 문득 불립문자란 말이 떠오른다. 不아닐 불 立설립 文글문 字글자자, ‘문자에 의하여 가르침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란 뜻이다. 곧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인바 따로 언어나 문자로 말하지 않는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의미다.

불립문자는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송나라의 중 도언(道彦)이 석가 이후 고승들의 법어(法語)를 기록한 ‘전등록’(傳燈錄)에 보면 석가가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불교의 진수(眞髓)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같은 송나라 보제(普濟)의 ‘오등회원’(五燈會元)에도 보면 어느 날 석가가 제자들을 영산(靈山)에 불러 모으고는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자 석가는 가섭에게 자신이 죽은 이후 정법을 후대에 전하도록 부탁했다. 어느 날 같은 십대제자인 아난(阿難)이 석가가 전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가섭은 "가서 깃대를 내려라"라고 했다. 사원 밖에 깃대를 내리라는 말은 언설을 집어치우라는 뜻이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도 불립문자는 이해가 된다. 바로 성경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 곧 성서의 말씀으로만 거듭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인 사랑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이룬다는 뜻이다.

글자로만 믿고 글자가 의미하는 것으로는 없는 사랑의 부재는 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립문자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 이상 할 말이 없는, 그래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고픈 말도 많고 정작 많은 말을 하고 산다. 하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진실 되게 상대에게 전달되었을까. 마음으로는 아닌데 입으로는 전혀 다르게 말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세상을 잘 사는 것이라고도 한다. 마음과 마음, 눈빛과 눈빛, 서로의 진실을 나눈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현실이다. 그래서 말을 하고나면 금방 후회 될 때가 많다.

전철 안에서였다. 젊은 남녀가 열심히 수화(手話)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이 집중되고 있음을 알았는지 둘은 수화를 멈추고 지긋이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아름답게도 느껴져 유심히 그들을 지켜봤는데 둘은 눈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대화가 눈으로 이뤄지고 있음이다. 저들은 눈이 먼저일까, 마음이 먼저일까. 먼저 마음이고 그 마음이 눈을 통해 나타나지 않았을까. 내 것을 통해 나타나는 나의 이미지, 그건 굳이 말로 설명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진다. 무언가에 불안해서이다. 그러나 그리 해놓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진실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전달되기 마련이다. 깜깜한 밤, 어둠 속에서 나를 보며 내 실체를 점검하고, 눈으로 대화를 하는 젊은이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느꼈던 것은 우리가 너무 소리로 된 말에 질려있는 때문은 아닐까. 너무 말이 많아 진실이 가리어지는 세상, 불립문자는 어쩌면 그런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화두일지 모른다. 뜻이 통했는데, 그의 생각 그의 마음을 아는데 새삼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무엇보다 진실을 살리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리라. 그 진실 속에 내가 있으면 그와 내가 하나 될 수 있다. 통한다는 말만큼 시원한 말이 있을까. 그와 내가 통하면 그의 마음이 솔솔 전해져 오고 나는 감격한다. 어둠 속에서 어둠과 어둠 속 별들과 나누는 이 행복감과 평안은 누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그 느낌 속에서 감격하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