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한 켤레

                                                           朴英子

  친구가 사는 아파트 앞을 지나게 되었다. 한동안 못 만났으니 별일은 없는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사는 친구인데 얼마나 힘들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잠깐 들러 볼까 싶었다. 집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무 소리 않고 갑자기 나타나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은 장난기 말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하는 가라앉은 친구 목소리와 함께 화면으로 확인하는 눈치다. 신발 끄는 소리가 나고 이내 문이 열렸다. 친구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맞는다. 낮잠이라도 잤는지 부스스한 머리며 화장기 없는 얼굴이 집안에 틀어 박혀 있던 눈치다.

“오늘은 방콕이구먼.” 하며 무심코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웬 남자 구두가 친구의 신발과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 낮 시간에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남자 구두라니? 언뜻 내가 잘못 온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친구를 못 믿는 것도 아니고 설마 나에게 비밀을 가지고 있을 그 친구도 아니라고 믿고 있는데 ‘아뿔싸! 실수를 하나보다.’ 생각했다. 친구와 그 검정구두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피는데 친구는 이내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박장대소를 한다. 그제야 나는 긴장을 풀고 아들이라도 온 거냐고 묻는다. 친구는

 “ 이 낮 시간에 지 에미 찾아 올 아들놈이 어디 있니? 우리 ㅇㅇ아빠 구두야......”

하며 말끝을 흐린다.

  좀 전의 웃음소리는 간데없고 소파에 앉은 친구와 나는 한참 말이 없었다. 친구의 얘기는 이랬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배달꾼이나 택배배달원이 드나드니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죽은 남편의 구두 한 켤레를 항상 내 놓고 산다는 것이다. ‘아! 그랬었구나.’ 잠시 잠깐이지만 친구의 어떤 행위를 상상했던 내가 부끄러워 무안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얼마나 순수하지 못한 속물이었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가 부끄럽다.

  혼자된 친구, 그것도 어릴 적 코흘리개 친구인 사이인데 마음은 늘 짠하고 안됐으면서도 무엇이 그리 바쁘기에 한동안 만나질 못했나. 전화라도 자주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 내가 얼마나 무정한가.

  작년 어느 날, 해가 설핏한 시간에 불자통차가 고래고래 소리치며 우리아파트 앞 간선도로를 내달렸다. 어디 불이난건가 궁금하여 베란다로 나가보니 구룡산 너머 친구가 사는 동네쯤에서 집동 같은 검은 연기가 치솟고, 불자동차는 그리로 달려가는 모양이었다. 순간 친구 얼굴이 떠올라 얼른 전화를 돌렸다. 몇 번의 전화벨이 울리는 동안 나는 가슴이 뛰었다. 대여섯 번이 울리도록 받지 않으니 필시 무슨 일이 있구나 싶어 전화를 들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친구의 “여보세요?”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무 일 없다니 천만 다행이었다.

  불은 친구네 집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 같은데 어디인지 가늠할 수가 없단다. 친구는 내 염려를 무척 고마워했다. 그 후 몇 번이나 그 소리를 되뇌는 걸 보면 내 작은 배려가 그에게는 무척 크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혼자이기에 외로움에 젖어있는 친구에게 조금만 신경써주면 작은 위로나마 받을 텐데 말이다. 무심했다기 보다는 마음만 있지 실천하지 못한 내가 많이 미안하다.

  남편이 외출한 시간에 쌀 배달을 온단다.  쌀은 무거워서 우리 두 노인네가 옮기기 힘들어 뒷베란다까지 들여놔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 판인데 어쩌나 싶었다. 나도 친구처럼 얼른 남편의 구두 한 켤레를 현관에 내 놓았다. 훨씬 마음이 놓였다.

  옷이나 물건 보다 신발은 그 사람과 동일시된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을 찾을 때는 신발을 찾는다. 강가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하얀 고무신, 왠지 섬뜩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남이 신던 신발은 잘 신지 않는다. 옷이나 물건보다도 신발에는 그 신던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듯싶다.

  수년 동안의 병 수발에 골이 빠진 친구, 이제는 그 그늘에서 벗어난 줄 알았더니 여전히 함께 살고 있었다. 죽은 남편에게 사랑만이 아닌 불평불만도 자주 털어 놓던 친구였지만 죽어서도 그 분에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늙어서 의지 할 곳은 자식보다도 남편이라고 했듯이 질긴 인연이 부부사이이다. 남편의 구두 한 켤레는 남편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