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 한동희 |
날짜 : 09-11-19 00:47
조회 :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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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 칼럼-
11월
한 동 희
11월의 하늘은 유난히 높고 청명하다. 유리알 같이 맑고 투명한 하늘은 구름 한점 없는 텅 빈 공간이다. 이기와 집착이 없는 무욕의 하늘. 그 정결한 하늘 아래 들판도 비어있고, 붉은 기운을 토해내던 단풍나무도 앙상한 가지에 마른 낙엽을 달고 그 소임을 다해간다. 길가의 코스모스도 초췌한 모습으로 스러져가고, 풀벌레 소리도 멀어진 지 오래다. 바다는 격랑을 잠재우고, 계곡의 물소리도 거센 숨결을 가다듬고 잔잔히 흐름을 유지한다.
11월엔 만물이 몸을 낮추고, 경건히 한 해의 마무리 작업에 들어간다. 11월은 격정과 환희, 좌절과 혼란 속에 분주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달이다.
11월은 여백의 계절, 적요의 계절이다. 찬란한 색채의 향연으로 가을을 찬양했던 산과 들이 황갈색의 적요에 젖어 여백의 미를 느끼게 한다. 여백에는 현란함에 가리워진 순수와 진실이 있고, 겸손과 절제의 미덕이 있다. 고연한 광채로 다가오는 약속의 말씀이 있고, 한없이 고요로운 미소가 담겨있다. 11월은 봄의 시샘도, 여름의 격랑도, 가을의 현란함도 모두 품어 안고 잠재우는 자비의 달이지만, 모든 것 다 내어주고 빈 몸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허무의 달이기도 하다.
11월엔 내 안의 뜰에서 자라고 있는 체면과 꾸밈을 걷어내고 싶다. 격식과 형식에서 벗어나, 텅 빈 하늘처럼 허허벌판처럼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 불꽃같던 열망, 권태와 나태, 비애와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내려놓고 한없이 빈 들판을 걷고 싶다. 쏴~아 하고 볼을 스치는 찬바람과 조우하며 자유와 평안을 만끽하고 싶다.
황량한 들판을 지나 어느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장엄하게 서있는 해 묵은 한 그루 나무 앞에 서서 묵상 하리라. 수 백 년 내려오는 뿌리의 전설에 귀 기울이며, 영원히 시들지 않는 생명의 빛깔에서 마음의 울림 하나 얻고 싶다.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내와 불굴의 의지를 보며, 서성이고 주춤거리던 방황의 늪을 벗어나 안정과 침묵 속에 내가 설 자리를 가늠해야겠다.
나목(裸木) 아래 쌓인 낙엽을 보료 삼아 편안히 눕고 싶다. 해마다 숱한 잎을 달아 낙엽이 되고, 썩고 썩어 거름이 되어주는 그 희생과 사랑을 보며, 낙엽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을 준비하는 모태임을 느낀다.
11월은 비움의 달이지만 내실을 다지는 달. 내 인생의 절기와 맞물리는 11월에 허무가 아닌 또 다른 시작을 꿈꿔본다.
11월엔 무언가에 도취되고 싶다. 가장 깊고, 오래가고, 영원한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도취는 무엇 일까. 나와 어떤 대상이 하나가 되어 나를 몰입하고, 나를 잃고 싶다. 음악, 글, 그림, 자연, 종교 등. 그 어느 것이든…
11월엔 사랑의 동경, 사랑의 고뇌를 가슴에 그려 넣고 싶다. 가을날, 속절 없이 깊어 갈 조락(凋落)의 창가에서 브람스의 현악6중주의 가늘게 떨리는 선율을 따라 현실이 아닌 꿈속의 환상에 젖어보면 어떨까.
브람스의 음악정신은 고전주의 시대로 뻗어있지만, 북부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로 언제나 그에게서는 멜랑코리가 묻어난다. 브람스는 25세에 약혼녀‘아가테’와 파혼했는데, 그것은 예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사랑의 속박을 끊기로 작정한 때문이다. 브람스는 그로부터 6년 후 아가테가 살고 있는 괴팅겐으로 달려가 그녀의 집 앞을 거닐다 돌아와, 마음 속에 품었던 아가테의 영상들을 오선지에 풀어놓은 것이 그 유명한‘현악6중주’제2번 G장조다. 브람스는 아가테를 사랑했고, 다시 그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회한과 탄식의 고백과도 같은 실내악곡을 들으며, 늦가을의 정취에 젖어보는 것도 좋겠다. 일명‘아카테 6중주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곡에는 브람스 특유의 체취와 우수(憂愁)가 담겨있어, 11월에 어울리는 사랑의 스잔함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일로 좁아진 옹달 가슴에 11월이 들어선다. 자연의 묵시록(默示錄)에 마음의 여백이 생기고, 브람스의 예술혼이 명상의 샘을 파놓는다. 11월엔 우리 모두 자연의 묵시록에 귀 기울이고, 심오한 예술혼에 도취되어 불후의 명작 한 편씩 남기기를 소망해 본다.
<약력>
한국수필로 등단(1986). 한국문인협회 고양지부장, 한국수필작가회 회장역임.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저작권 옹호위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문학의 집 서울ㆍ회원. 수상: 한국수필문학상, 고양시 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수필집: <사람, 그 한사람> <느낌표처럼 사랑했다> <소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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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09-11-19 0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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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참 좋은 달입니다. 11은 사람 둘이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요. 11월 11일은 빼빼로의 날이라서 나같은 사람이 빼빼로 과자를 먹는 날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광주에서 춘천으로 발령을 받아 이사를 오는데, 아파트 사모님들이 서운하다고 우는데 그날이 11월 11일이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하는말 왜 우시느냐고, 오늘을 11월 11일 젖가락 두개인데 먹기만 하면 되는 좋은 날이니 울지 맙시다. 하고 결국은 나도 서운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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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09-11-19 09: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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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밤 같은 나이, 일년 중 12월 같은 나이에 '성찰의 달', 허무의 달' 11월의 글을 보니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합니다.
그 11월 어제 영종도의 백운산을 올라 보니 '천고마비'에서 천고(天高)의 맑은 하늘 아래, 아름다운 한국산하를 보고 왔습니다. 비움의 달에 이렇게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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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희 |
09-11-19 1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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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그러고보니 11월11일은 빼빼로의 날이군요. 출판기념회에 못나가서 보고싶은 사람들 못만나서 그런지 언제 만나나 기다려지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빼빼로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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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희 |
09-11-19 1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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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선생님, 선생님은 아직도 붉은 단풍이 가을을 찬양하는 10월이십니다. 올해들어 가장 추운날에 백운산을 다녀오셨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아름다움을 담아오신 선생님께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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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09-11-20 1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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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예 선생님은 브람스에게 마음을 내어주셨군요.
숙살지기는 온누리의 생명들을 심판하고 떠나갔는데
11월의 빈들을 가로질러와서 볼을 스치는 찬바람은 또 무엇일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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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09-11-22 1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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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아름다운 가을날의 감성을 죄다 풀어 놓은 좋은 글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독일 다녀 오시느라 여독도 풀리지 않았을 것인데 언제 글까지 달아 놓으셨네요.
찬바람과 함께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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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희 |
09-11-22 1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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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순 선생님, 박원명화 선생님, 감사합니다. 독일에 가면 함부르크의 브람스 생가를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독일 가기 전에 이글을 썼고, 계절적으로 11월에 독일 여행을 했기 때문에 그곳의 기후(비 또는 안개)에 어울리는 멜랑꼬리에 젖어있었습니다. 여행 중에는 잠간씩 햇빛이 나기도 했지만, 대부분 비와 안개속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번 여행은 남 서부쪽으로 갔기 때문에 북부 의 함브르크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 번 독일 여행에서 독일 사람들의 근검, 절약, 정확성(적당주의가 없음)을 보며, 그 나라가 부강한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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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09-11-22 2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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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 11월호에서 선생님의 권두칼럼을 읽으며 11월을 맞았는데 이 달도 벌써 하순에 접어들었습니다. 독일 다녀오시고 나서 여독은 다 풀리셨는지요.
독일 다녀오신 이야기 기대하고 있습니다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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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희 |
09-11-22 2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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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네요. 전화통화는 했는데 꿈결에 받은 것 같아요. 한동안 움직이기도 싫고, 11월의 우수가 가슴에 가득차 우울증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도 됐는데, 이제 여독은 풀린 것 같아요. 다녀온 이야기 정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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