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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임병식 |
날짜 : 09-04-07 10:01
조회 :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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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방죽
임병식
차를 몰고 고향집을 가는데 안개가 잔뜩 끼어있다. 짙은 농무가 한정 없이 이어져 걷힐 줄을 모른다. 좁아진 시계를 뚫고 가자니 제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차간안전거리를 지키고 가면서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켜놓은 라이트는 고작 전방 10여 미터를 비출 뿐이 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작정인지 모르겠다. 하필 이런 날, 길을 나선 건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전부터 예정해놓은 날이긴 하지만, 집을 나서면서 외려 이런 안개가 반겨졌던 것이다.
전에 고향에 살적에 읍내 학교를 가자면 재를 하나 넘는데 그때 보면 산마루에는 늘 안개가 걸려 있었다. 안개터널을 뚫고 한참을 나가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보면 냇가부근에 안개가 많이 끼었는데, 물이 가두어진 방죽은 정도가 훨씬 더하여 시야를 온통 가려놓곤 하였다.
나는 향제(鄕第)에 도착하자, 차를 세워두고 첫대비기로 방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방죽은 고향마을에서 약 1키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거기에 가볼 생각이 든 건 어릴 적 추억이 가장 많이 남아있어서였다.
찾아간 방죽 역시 자욱한 안개, 아니 는개에 덮여있었다. 무슨 비밀이라도 된양 공개하지 않으려고 천막으로 덮어놓은 듯 했다. 당연히 담수가 된 물은 보이지 않고 대신 뺨에 축축한 물기만 와 닿았다. 는개는 안개보다는 수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방죽 둑에 올라서니 시계(視界)가 열리지 않는 반면, 웬 생뚱맞은 사람이 떠오른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방죽 관리자다. 그는 일자무식인데도 늘 양복차림에 포켓에는 만년필을 꽂고 다녔다. 하루는 아는 이가 다가가 짓궃게 글씨를 좀 써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당황한 기색없이 능청스럽게 잉크가 떨어졌다고 둘러 대더란다. 그 생각이 날 때마다 누가 영자신문을 반대로 들고 있기에, 왜 반대로 보느냐고 하니 앞쪽에서 쳐다보는 당신 읽어보라고 그러더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일이 머리를 스친다.
이 방죽을 고향에서는 '저수방죽'이라고 부른다. '저수'가 고유지명이 아닌데 그렇게 혼합하여 부른데는 '저수지'라는 말이 좀 생소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저수지는 일제 시대에 많이 만들고 불리우기 사작했는데, 아무래도 낯설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 한편, 방죽이라는 말은 옛날부터 써온 말인데, 그 어원은 물이 넘치는 것을 막는다는 뜻의 방축(防築)이란 말이 변형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방죽이라는 말은 근래에 생긴 게 아니고 옛날 부터 불리어온 말이다. 그 근거로는 조선 고종조때인 병자년에 극심한 가믐이 들어 방죽이 모두 말라버렸는데, 이를 빗대어 ‘건방진 사람’을 일러 ‘건방죽’라고 했다는 걸 보면 알수 있는 일이다.
좀처럼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는개도 해가 중천에 솟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두꺼운 휘장을 걷어내고 제 모습을 드러내 준다. 한데, 눈에 들어오는 규모가 턱없이 작아 보여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흔히 보면, 어려서 보던 나무나, 바위가 커서보면 작아 보이듯이 마치 그런 기분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수문 개패기(開閉器)며 물이 넘치면 흘러내리던 수로는 옛 모습을 그대로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둑에 지천인 띠풀이며 수영할 때면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단단히 틀어막던 쑥도 그대로여서 정겨워 보인다.
둑 위에 서서 한참을 물이 가득한 방죽을 바라보니 머리 속에 각인된 추억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든다. 지금도 맞은편 저 언덕배기에는 때죽나무가 그대로 있을까. 때죽나무는 저수지 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여름 한철 알싸한 흰 꽃을 피웠는데, 그 향기에 취한 나는 나무 위를 뛰어넘어 물속으로 입수를 하곤 했었다.
그리고는 자맥질을 하여 바닥까지 내려가 흙을 한줌 쥐고 올라와선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보여주곤 했다. 그런 놀이를 하다가 하루는 잘못 뛰어내려 배에 충격을 받고 고통을 받은 기억도 생생하다.
그무렵 나는 이른 아침과 해질녘에 둑으로 나와 달리기 연습을 했다. 둑의 길이가 얼추 100미터 쯤 되어서 단거리를 하기에 좋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기에 썩 소질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기껏 100미터를 13초에 달리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매일 거르지 않고 나와 운동을 했던 것은 아마도 입고 있던 유니폼을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학교 핸드볼 선수로 활동을 하면서 운동복을 지급 받았는데, 그게 멋있어 보이고 다용도로 쓰였던 것이다. 그 운동복은 인기가 있어서, 동네 형들이 마라톤 경주에 출전하거나 달리기 경주에 나갈 때는 단골로 빌려입어 출전복 역할을 하였다.
그런 저런 생각이 떠오른 김에 이번엔 당시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때 달리기 연습을 하면서 10미터 간격으로 돌을 박아 놓은 기역이 있어서 혹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한데, 세월이 많이 흐른 탓인지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방죽 둑을 내려서서 납작한 돌을 한 개 집어 들어 자세를 낮추어 수제비를 떠보았다. 돌은 파문을 일으키며 두어번 튀기다가 그대로 갈앉아 버린다. 두번째 시도는 하지 않고 손을 털고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새삼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뇌리에는 추억을 더듬은 끝이어선지 고향동무들의 모습이 스치고 순박한 웃음소리가 환청이되어 들려왔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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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09-04-07 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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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회장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글 잘읽었습니다. 저도 어려서 방죽을 생각합니다. 둠벙이라고도 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늦가을 방죽한개를 물을 품어내고 미꾸라지 잡던 생각이 납니다. 겨울잠을 자기위헤 흙속에 들어간 미꾸라지를 잡아다가 추어탕을 해먹으면 그 맛이 얼마나 쌈빡하던지요. 지금 도회지에서 추어탕을 먹어보아야 어려서 그 맛이 안납니다. 저도 이제 많이 회복단계에 와 있습니다.통증도 많이 가셔서 살맛이 납니다.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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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04-07 1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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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하시길 천만 다행입니다. 노인이 고관절을 다치면 오래가더군요.
둠벙, 방죽 이런말은 순 우리말인데, 일제시대부터 방죽은 저수지로 또 규모가
큰것은 댐으로 이름이 달리불러지게 된것같습니다.
옛날의 흔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40-50년이 지나다보니
찾을수가 없더군요.
홈피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글을 많이 올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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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09-04-09 1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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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없이 창작 하시는 임병식 회장님의 열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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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04-09 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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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희선생님, 지난번 건강하신 모습 뵈니 반가웠습니다.
작품은 한달에 두편씩은 써왔는데, 금년은 아무래도 신경쓸 일이 많아
한편으로 낮춰잡았습니다.
글을 꾸준히 쓰는 건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글도 편식을 하지 않고 추억을 더듬는 글, 의미화가 필요한 글,
사색적인 글을 다양하게 쓰려고 합니다.
어느 카페에 이름이 떠서 들어가 봤더니 최선생님 글이 여러편 있더군요.
'철들자 황혼'(?)을 읽었습니다.
문학기행때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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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승 |
09-04-10 1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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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죽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의미 차이가 있더군요. 글에 친절하게 밝혀놓으셨네요. 저도 그런 차이 때문에 글을 쓰면서 망설였던 적이 있습니다.
글을 읽다보니 윤흥길의 소설 완장이 떠올랐습니다. 글에 나오는 관리인과 캐릭터가 아주 흡사했습니다.
잠시 저도 유년의 기억에 젖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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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04-10 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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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옛 직장 퇴임 동료들과 소록도와 나로도 우주과학관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소록도에서는 감금장과 하나운 시를 새긴 바위를 쓰다듬어보고 오고, 나로도에서는 겉모습만 봤습니다. 아직 과학관은 개관을 하지 않았더군요.
윤흥길의 완장찬 사람은 교만을 부린 사람이지만, 저수지 관리자는 겉멋을 부리는 축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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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09-04-11 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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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없는 창작의 열의를 꽃피우시는 임병식회장님!
대단한 열정이 사뭇 부럽습니다. 자연과 생활, 그리고 모든 일상의 일들에 이르기까지
적재적소에 배열하듯 막힘없이 쓸 수 있는 저력이 어디서 나오시는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방죽'이란 단어를 들으니 어릴 적 동네 방죽에서 미역감던 일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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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04-11 1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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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하루도 집에 차분하게 붙어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어제는 여행을 다녀오고, 오늘은 예식장에 들르고 내일은
대종회 시제를 다녀올 생각입니다.
논농사를 짓는 곳은 크거나 작거나 방죽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 마을 '저수방죽'은 중간쯤 크기지요.
부지런한 새가 먹이도 많이 물어나르듯, 많이 써야 그중에
하나라도 건질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 많이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초여름 기온을 보이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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