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잎사귀와 이별을 서두른다.

저 입춘의 조용한 아침으로 부터 태양은 푸른 생명을 모아 나무를 축복해 주었다. 일곱 빛깔 무지개가 숙살의 기운을 불러 가을바람에 실어 보내지 않고서야 단풍이 저리 고울 수는 없다. 나무는 푸른 생명을 겨울눈에 보석으로 간직하고서 속곳까지 채색한 비단 옷 하나 둘 벗어 하늘을 노래한다. 감사의 향연(香煙)에 하늘 문이 열리고 잎들은 땅에 눕는다. 강물은 흘러가고 기슭은 그 자리에서 계절을 엮어낸다. 빛은 화합하여 이윽고 새하얀 예복을 마련한다. 오색의 단풍은 한 데 어우러져 눈처럼 순결한 빛으로 부활한다. 사람들은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성을 탐한다. 색은 색을 사랑하는 듯 미워하여 흑암에 빠져드니 혼돈하고 공허함이 색즉시공이런가. 세상의 꿈은 따로 좋아 보이나 간음하니 어둠이요 무덤이다.

덜꿩나무의 가을을 횡재하고 가시에 찔려가며 청미래덩굴의 붉은 열매에 빠진 그 사람은 전제(奠祭)로 그들의 머리 위에 독한 술을 붓는다. 열매는 뿌리의 영광을 노래한다. 토복령의 본성은 붉은 열매에 적나라하다. 은행나무 뿌리는 노랗게 익어있고 내 민낯에도 부조의 내력이 새겨져있을 터이다. 소슬바람에 흩날리는 샛노란 은행잎의 물결 속에 빠져있는 그 사람은 오고 있는 겨울을 모르고 있었다. 겨울을 날 양식을 곡간에 쌓아올려 두었기에 개미의 지혜로 근심을 거두었노라 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은 가을을 남겨두지 않았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그의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누구의 게으름을 나무라던 그는 어느 공원의 벤치에서 떨고 있는가. 소경은 등불을 챙기는데 그 사람은 지금 칠흑의 골목에서 오직 내왕의 낯익은 세월을 변명하며 비틀거린다.

비가 내릴 무렵이면 대지의 습기들이 일제히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해 비손하는 숙연한 광경이 펼쳐진다. 하늘이 천사의 바람을 보낼 적에 작은 도랑과 추수를 기다리는 논배미의 물꼬에 고인 물이 수정으로 변화하는 시간들을 지켜보았는지요. 진종일 서있어 고단한 산맥이 어머니의 강에 안겨 잠들어가는 그 적막한 사랑이 나를 어둠 가운데 세워두었다. 붉은 노을이 타오르던 바다에는 하늘빛이 완연하다. 먼 산들이 어머니의 품을 열어 눈물겨운 그리움을 부르는 목소리는 ‘평화’이다. 그 소리는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맨 처음 겨울을 맞이한 그는 여울이었다. 지식이 깊지 못한 이들은 표독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였고 강은 슬피 우는 체하며 나그네의 가슴을 속였다. 바다가 보여주던 무한한 아량은 땅의 감옥 안에서 부리는 허세에 지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차가운 신발을 고이 품으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겨울이 유난히 추운 까닭은 우리들의 가슴만이 따뜻하고 가난한 동네의 연탄불이 꺼진 탓이지요.

사람들은 시퍼런 겨울바다의 이성과 붉은 노을빛 정열이 몸을 섞어 언덕 위에 새긴 보랏빛 꿈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빨강은 아름답고 하양은 순결하다. 빨강과 하양의 입맞춤에 연분홍 봄이 온다. 유혹의 속삭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소박해 보이는 꿈의 조각들을 하나 둘 품어 안았다. 그러나 그토록 아름답고 순결해 보였던 꿈들은 빛을 잃어갔고 어느덧 검은 욕망으로 화하여 우리를 돌이킬 수 없는 흑암에 가두어버렸다. 그들이 새로운 탄생을 기뻐할 때마다 그들 자신이 그토록 경탄해마지 않았던 탄생의 실체가 조금씩 빛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색계의 광음천 사람들이 감천의 달콤한 밀어와 땅에서 나는 지미의 감칠맛에 빠져 광채를 잃고 몸이 무거워져 날지 못하게 될 때까지.

때로는 식상해 뵈는 녹음은 조물주의 근본이다. 눈부신 녹색은 무지개의 한가운데서 온 세상의 생명을 꿈꾸었고 수목은 그들의 자랑이 창조주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었다. 나무는 다시 오는 봄의 영광을 위하여 초록을 겨울눈에 간직하고 여섯 빛깔의 오케스트라를 꾸려 천변만화하는 단풍의 선율을 창공에 수놓아 하늘에 돌려드리고 있었다. 나는 태초의 빛으로 무지개를 보내준 하늘에 올리는 그들의 장엄하고 즐거운 축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은 영광을 받을 뿐 바람의 신에게 명하여 낙엽으로 대지를 축복하였다.

참된 글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여 세상을 밝히는 빛이니 이는 ‘문명(文明)’이다. 글은 종이에 표구된 박제가 아니라 세상으로 걸어 나와야 하고 봄의 정원에 자유를 선사하는 나비가 되어야 하니 이것이 곧 ‘문화(文化)’이다. 글은 밝아져서 마침내 약속한 대로 화해야 한다. 나뭇잎이 푸름은 문명이요 오색 단풍이 새삼스레 햇살에 빛남은 문화이다.

그 빛은 그의 눈을 밝히고

그는 드디어 글 속에서 걸어 나온다.

그는 책 속에서 걸어 나온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