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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1-04-27 19:44
조회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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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의 안경
김창식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를 읽던 중 오래 전 수용연대에서 겪었던 황당하고도 씁쓸한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수용연대는 훈련소 입소 전 입영 대상자들의 신체검사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난 그곳 안과에서 담당 군속이 만들어준 안경을 쓰고 훈련소로 '팔려'갔다. 아테네 교외 강가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프로크루스테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막가파 아들로 나그네를 유인하여 철 침대에 눕힌 후 침대 길이에 맞춰 몸을 늘리거나 잘라 죽여 버린 악당이다. 신화 속 괴인과 오래 돼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은 군속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날 나는 괴나리봇짐을 옆에 끼고 '집 뎌나는 홍길동'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친척집에서 하루를 머물고 집결지인 K시 공설운동장으로 갔다. 우리 도 입영대상자들은 일차 그곳에 집결해 수용연대와 훈련소가 있는 논산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완행 밤 열차에 오르자 차 안은 벌써 군대분위기였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군가가 흘러나오자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의 장정(壯丁)이면서도 벌써 군인이라도 된 양 노래를 따라 부르는 무리도 있었다. 나는 나누어 준 건빵과 별사탕을 깨어 물며 한탄했다. "아, 봄날은 가고 내 청춘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수용연대에 도착한 우리는 낯선 곳에 방목된 소 떼처럼 이리저리 뒤엉키며 신검(신체검사)을 받으러 다녔다. 군대에서는 하루가 새롭다. 수용연대에 체류하는 일수는 군복무 기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신검 완료 표지인 '완(完)' 자 도장을 받아 되도록 빨리 훈련소로 건너가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약삭빠른 자들은 연줄을 찾아 '기름칠(금품 건넴)'을 해서 목적을 이루었다. 보름여가 지나자 우리 도 장정들은 모두 떠나갔고 다른 도 장정들이 너 댓 차례 더 거쳐 갔지만 나는 그곳에 계속 남아 있었다. 어언 수용연대에서도 알아주는 왕고참 장정으로 행세하며, 그 곳 생활에 길이 들어갔고 이대로 날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나는 다른 항목에선 통과했으나 안과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짬밥(잔반)'을 먹고 안과로 가면 그곳 관계자들은 나를 오전 내내 시멘트 바닥에 쭈그려 앉혀 놓았다가 다른 사람들만 검안하고 내겐 점심 먹고 오라고 했다. 오후에 가 보면 하릴없이 앉혀 놓았다가 또 내일 아침 오라고 했다. 다음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안과에는 군의관, 검진을 보조하는 작대기 넷(병장)과 안경을 제조하는 중년의 군속이 있었다. 군의관은 자리를 자주 비웠으며, 그럴 땐 늙수그레한 군속이 업무를 대신했다.
깡마르고 강퍅한 군속은 자기도 안경을 낀 주제에 빨간 불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비쳐보며 "너는 참 눈깔이 나쁘구나!", 비웃고는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바닥에 꿇어앉아 있으라고 했다. 어느 날 변소(便所)에서 군속을 만났는데 뒤 곁으로 끌고 가더니 "너 군대 갈래, 집에 갈래?", 웃음을 띠며 물었다. 나는 그때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이 재수 없는 놈아! 너, 수용소 말뚝 박을래?", 침을 뱉고는 그냥 가버렸다. 돈이 떨어진지 이미 오래였다. 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돈이 있었다면 그에게 주었을 것이다.
수용연대에 온지 한 달여가 지났을 때 상부에서 계류(繫留) 중인 자들의 즉각 처리를 시달했다. 나는 군속이 날림으로 만들어 준 회색 플라스틱 테 안경을 끼고 훈련소로 옮겨갔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세계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에다 억지로 눈을 맞추는 것이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장자(莊子)의 비유처럼 '물오리의 짧은 다리를 잇고 학의 긴 다리를 자르는 행위'와 다를 바 무엇이랴. 사격장에선 과녁이 흐릿하여 표적지 천에다 얼추 쏴버려 '숙달된 조교' 에게 된통 혼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군대에서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안경에다 눈을 맞추라고'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음번엔 꾀가 늘어 목표물을 오조준 사격하여 가뿐하게 통과했다.
두 달 여 기초군사 훈련이 끝나고 자대에 배치될 무렵엔 눈도 어지간히 안경에 적응하게 돼 불편한 대로 내처 쓰게 되었다. 뿐 아니라 제대 후 복학하고도 한동안 군대 안경을 끼고 다녔다. 흠집투성인데다 칠이 벗겨져 나가고 낮은 포복 높은 포복 하느라 먼지 때가 낀 안경을 바꿀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렇지만 그때는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고 그런대로 쓸 만한 '장신구'를 낡았다는 이유로 바꾸는 것은 사치로 여겨졌다. 그보다, 검안 후 전문 안경사가 권해 주는 교정용 안경은 너무 불편했다. 어지러워 몇 발자국 걸을 수가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원래 도수가 맞지 않았던 군대 안경에 길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내 눈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으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흔히 아집과 편견을 경계하는 관용구로 인용된다. 신화를 다시 읽으며 자기만의 일방적인 규격과 잣대로 사람을 해한 프로크루스테스가 군속이 만들어 준 안경을 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요즈음의 우리를 둘러싼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 입장과 이념차이로 나뉘고 연령대, 신분과 계층에 따라 정서를 달리하는 등 갈등의 골이 깊은 듯하다. 정치, 사회적 현안은 물론 문화 현상을 두고도 관점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필생의 적인양 대립한다. 마치 곳곳에 땅이 갈라지고 절벽과 단애(斷涯)가 생겨나는 재난영화를 보는 것처럼 위태롭다.
이러한 갈등과 분규의 원인이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 신화 속 악당 프로크루스테스처럼 군속이 만들어 준 것과 같은 종류의 안경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선후를 뒤집고 현상을 왜곡하는 독단의 안경! 미리 만들어 놓은 자기만의 경직된 틀을 통해 세상일과 사물을 재단하고 생각과 정서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편을 갈라 상대방의 존재를 공격해온 터이니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분열과 혼란은 다른 안경을 쓴 타자의 존재이유와 개연성(蓋然性)을 인정하지 않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는지. 상상 속 안경 쓴 프로크루스테스의 괴상한 모습은 우리에게 소통과 화합, 상생(相生)의 삶을 향한 역설적 깨우침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계간문예> 2011 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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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1-04-28 0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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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가 만든 침대나 군속이 만들어준 안경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비정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궁금한 것은 김선생님의 시력이 어느 정도이었기에 그 좋은(?) 수용 연대에서 왕고참노릇까지 하며 지낼 수 있었는지 신기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눈 부릅뜨고 들여다 보아야하겠습니다. 김선생님의 두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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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4-28 0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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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2월~1970년 1월 수용연대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내리 안경을 썼습니다. 게다가 마르고 키까지 작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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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1-04-28 0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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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침대에 맞는 키를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침대에 꼭맞는 사람이 눕더라도 침대의 길이를 조절하여 죽였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진짜 프로크루스테스의 안경을 쓰셨더라면 눈이 안경에 적응하는
기적같은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선생님이 잠들기를 기다려 밤마다 더욱 도수가 맞지 않은 안경알로
바꿔치기했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상대세력'에게 일단 적으로 낙인 찍힌 자가 그들에게 포용된다거나 존재이유를 인정받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에 부르르 몸이 떨립니다.
상대는 다름아닌 '프로크루스테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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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4-28 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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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푸르스테스가 그랬군요. 제가 몰랐던 또 다른 면입니다.
이희순 선생님의 촌철살인적 경고는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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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4-28 0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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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선생님,
부지런히 또 좋은 글 쓰셨군요.
만나서 반가웠고, 또 두목, 소 두목 통함이 시원했습니다.
건재하시기 바랍니다. 또 저수지에 고기가 없다고, 물이 좋지 않다고
한탄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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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4-28 08: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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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낚시터의 즐거움'이란 수필을 쓰겠습니다. 삶의 의미와 이치가 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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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1-04-29 0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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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군대생활을 연상하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군대 갔다왔지요. 에피소드도 많지만 어떻든 군생활이나 교도관 생활이나 제복공무원 생활이니 피장 파장이란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지금도 합니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직장도 마무리 하고 할라버지가 되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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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4-29 0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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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은 누구나 인정하듯 모든 면에서 영원한 현역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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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1-04-30 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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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활발한 문단 활동을 하시는군요.
새로운 수필집 출간 준비도 하고 계시겠지요.
글도 글이려니와 남성 작가님들과의 군대생활 이야기 소리가
점점 높아지는 느낌입니다.ㅎㅎ
전 경험은 없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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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4-30 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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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이야기가 별로 흥미로운 소재는 아니어서 망서렸습니다.
사실 저도 피하려 했는데 그만 우연히 쓰게 되었군요, 최복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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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태자 |
11-04-30 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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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하신 김창식 선생님 또 글을 올리셨군요.
선생님께서 안경에 눈을 맞추었으니 세상의 어떤 일에도
잘 적응 하시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동안'으로 살고 계시는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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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5-01 1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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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자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동안...'은 제가 아직 철이 좀 덜든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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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1-05-03 2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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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안경이 참 귀하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패션 소품이 되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안경을 쓰고도 군복무를 무사히 끝내고, 마침내 훌륭한 수필가가가 되신
김창식 선생님께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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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5-04 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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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 '는 안경 연작' 중 일부입니다, 이진화 선생님.
그러니까 등단작 '안경점의 그레트헨'의 프리퀄이 되는 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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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1-05-04 2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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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안경에 얽힌 이야기가 솔솔 풀려 나오겠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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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5-05 1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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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진화 선생님은 못 말리겠는걸요. 졌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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