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회 신입회원 가입 안내 |

무지개 속 남색을 찾아서

 

이진화



 음악을 좋아하는 일곱 명의 문우가 있다. 몇 해 동안 함께 음악을 듣거나, 전시회와 공연을 보고, 종종 여행을 하며 지냈는데 지난 연초에 모였을 때 일곱 명이 책을 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일곱 명의 글벗들이 문학과 음악을 사랑하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여 칠인 칠색의 글을 써서 묶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 색을 정해 빛깔에 따른 사유를 하고 자연과 사물에 대해 관찰하면서 얻은 영감으로 수필을 써보자고 약속을 하고 원하는 색깔을 하나씩 고르게 되었다. 색이라는 것이 섞이거나 분산되는 데 따라 여러 가지 변화를 보이지만 대략 누구나 좋아하는 색깔은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무지개의 일곱 빛깔 중 하나씩 고르고 나니 남색이 선택받지 못하고 끝까지 남았다. 청소년기를 개성 없는 남색이나 감청색의 교복 속에서 보낸 까닭인지 나 역시 평소에 특별히 좋아하던 색은 아니지만 선택의 여지없이 남색을 고르게 되었다.

 선택한 후부터 관심과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한 남색은 어디에나 있을 법 하지만 흔히 눈에 띄는 색이 아니다. 파랑에 치우쳐 있거나 보라와 섞여있는 듯 개성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빛 가운데서는 파랑이 되고 어둠 속에서는 검정으로 보인다. 지난 연말 송년회에 갔다가 벗어놓은 코트 중에 검정색을 내 것인 줄 알고 가지고 나오다가 되돌아가 바꾼 적이 있다. 옅을 때는 화려해 보여도 짙어지면 깐깐해지는 남색, 한순간 마주치더라도 스쳐 지나갈 때가 많지만 평범해 보이다가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을 풀어내는 비색(秘色)이다.

 자연 속의 남색은 짧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필리핀의 작은 섬으로 통통배를 타고 나갔다가 넓은 바다 위에서 거대한 무지개를 본 적이 있다. 마치 파스텔로 그린 듯 부드러운 빛깔의 어우러짐이 하늘과 바다에 걸쳐 있어 색을 일일이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해뜨기 직전의 여명의 하늘에 잠시 머물던 남색은 달이 뜬 바닷가의 밤에 슬며시 그 빛을 드러내거나 장엄한 산맥의 능선을 그리기도 한다. 화학 물감이 나오기 전 옛 화가들은 짙은 남색의 청금석(라피스 라줄리)을 갈아 그런 빛깔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름조차 외지 못했던 라피스 라줄리가 눈에 들어온 것도 남색을 주목하면서 부터의 일이다.

 생활 중에 가장 쉽사리 남색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한복의 남색치마이다. 본견의 광택과 사각거리는 감촉 속에 남색은 홀로가 아니라 다른 색들을 받쳐주는 조연으로 빛이 난다. 어디서나 두드러지는 빨강과 짝을 이루어 태평무를 추는 무용가의 금박 올린 겹치마가 되고, 허리를 동여맨 여인네의 감칠맛 나는 치마가 되어 장고춤을 추고 군무를 한다. 남색 치마가 없으면 은행색의 저고리나 옥색 저고리도 빛을 잃는다. 무명에 쪽물을 올린 생활 한복은 옅은 하늘색과 밤하늘색과 바다색이 번지고 어울려 독특한 맛을 낸다. 비단이나 모시에 올린 쪽물과는 다른 질박함이 여백을 내주어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편안하게 애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남색(藍色)이 사람 속에서 가장 깊어진다는 걸 옛 어른들의 말씀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쪽(藍)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이르는 말이다. 쪽풀을 짓찧어 독에 담고 발효시켜 많이 저으면 저을수록 짙은 색이 우러난다. 풀색의 쪽풀에서 어떻게 쪽물을 우려내고 쪽빛, 남색을 찾아냈을까. 젓고 저어 깊은 발효를 하면 그동안 가르침을 주신 스승들보다 깊푸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보다는  누군가에게 내가 먼저 배운 것을 전하거나 코칭하여 나보다 성장하는 것을 본다면 더 큰 기쁨이 있으려나.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무지개 속에 숨은 남색을 생각하다 난데없이 사람들의 얼굴이 구름처럼 피어난다.

-그림: 강구원 화백/우연의 지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