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0-11-22 11:21
조회 : 2138
|
|
|
|
영혼의 가객(歌客) 김정호
김창식
엊그제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나 싶더니 벌써 깊은 가을입니다. 새삼 세 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잿빛 하늘은 낮게 깔리고 푸른 안개가 일렁이며 헐벗은 나무는 고개를 숙인 채 다가올 추위를 걱정합니다. 노래의 정서가 늦가을에 걸맞아 이맘때 유난히 생각나는 가수들이 있습니다. 배호, 차중락, 장현, 이용, 최백호… 그리고 김정호(1952. 3. 27~1985. 11. 29)입니다. 짧은 생애를 살다간 김정호의 기일이 공교롭게도 11월 29일이군요.
누구든 김정호의 노래를 한 곡이라도 들어보면 그의 노래가 민족의 고유 정서인 한(恨)과 끈 닿아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대중가수치고(요즘 가요계를 접수한 댄싱 아이돌 가수들은 열외로 하고) 한의 정서에 뿌리를 두지 않은 가수가 있으랴만 진정으로 예술로 승화시켜 감동을 준 가수는 드뭅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활동을 접은 원로, 중견 트롯 가수와 몇몇 현역들에게서 전범(典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편 김정호는 트롯 계열 가수가 아니고 포크 가수라는 점에서 그들과도 구별됩니다.
김정호의 득음(得音)은 배호, 조용필 등과 함께 톱클래스 수준입니다. 그의 노래는 피를 토하는 듯 한을 절규합니다. 특히 고음으로 치달을 때 목소리의 여음(餘音)이 그러한데, 최근 자료를 검색하다 외가 쪽에서 창(唱)의 명인들을 많이 배출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외탁인 셈이지요. 한과 설움의 정서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예술의 효능 중 하나가 카타르시스임을 상기하면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정호의 노래를 들으면 심신이 맑아짐을 느끼는데 울고 나면 개운해지는 이치와 같다고 할까. 슬픔은 때로 사람을 건강하게 하더군요.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작은 새', '저 별과 달을', '외길', '달맞이꽃', '나그네', '기다림', '사랑의 진실', '잊으리라'. '행복의 나라로', '세월, 그것은 바람'…. 그가 부른 노래를 일람하며 느끼는 점이지만 그가 발표한 노래치고 히트하지 않은 곡이 없음을 알고 새삼 놀랐습니다. 게다가 그는 단순히 가창력 있고 노래만 잘 부른 가수가 아니고 송창식, 이장희, 김민기, 이정선과 함께 몇 안 되는 싱어송라이터였습니다. 탄탄한 작곡 실력을 바탕으로 포크 음악의 새 지평을 연 것이지요. 김정호와 그룹 어니언스의 관계는 특히 밀접했는데, 어니언스가 발표한 대부분의 노래는 김정호가 작사‧작곡해 준 것입니다. '편지', '그리움 찾아' 등 2~3 곡만 임창제가 작곡한 것이지요.
1970년대 말로 기억합니다. 명동 유네스코 회관 뒷골목 '마음과 마음(Heart to Heart)' 옆 지하에 있는 '청맥(靑麥)' 맥주 집에서 김정호와 조우한 적이 있습니다. 지나치며 서로 눈인사를 나누기도 했지요. 제가 큰 키가 아닌데도 김정호는 어깨 어림으로 더 작았습니다. 그가 무대에 올라 기타를 조율하고 막 알려지기 시작한 노래 몇 곡을 부르더군요. 상고머리 장발에 창백한 안색, 겁먹은 듯한 큰 눈, 진땀으로 범벅된 얼굴. 이마엔 머리카락 몇 올이 땀에 젖어 달라붙었습니다. 쥐어짜지 않으면 노래가 안 되는 것인지 전심전력을 다해 노래 한 곡 한 곡에 혼을 실어 부르더군요. 그 진지하고도 귀기서린 형모(形貌)는 다른 어떤 가수에게서도 일찍이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후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으로 나돌았었기에 전혀 뜻밖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김정호는 내부의 고통스런 무엇과 치열하게 싸우며 '온 몸으로 밀어내는' 노래를 부른 것이었어요. 그러니 그의 노래가 짙은 호소력을 가질 수밖에요. 그는 스스로의 고통으로 우리의 고통을 감(減)해준 영혼의 나그네가 아니었는지. 늦가을의 정취가 느껴지는 이 계절 그가 부른 노래 '날이 갈수록'이 들리는군요.
'가을 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캠퍼스 잔디위엔~ 또다시 황금물결~/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 얼굴들… '
* 자유칼럼(www.freecolumn.co.kr) 게재 글, 2011. 11.11(목)
코스카 저널(Kotsca Journal)수록. 2011. 11. 22(월), 김창식
|
|
| 임재문 |
10-11-22 13:47 |
 |
|
이제는 늦가을이 아닌 초겨울로 접어드는 듯한 을씨년한 날씨들이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저도 음악에 심취해서 특히 가요, 밤이고 낮이고 길을 걸으면서도 심지어 이어폰으로 음악을 감상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이 음치가 노래를 부르기시작했다고 하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그리고 어젯밤인가 내 노래를 녹음해서 다시 들어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다른사람들의 귀에 공해가 되었었나 실감했습니다. 왜 그렇게 노래를 못부르게 음치로 태어났을까 ?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렵니다. 내노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
| |
| 김창식 |
10-11-22 15:00 |
|
임재문 선생님, 이어폰으로도 음악을 듣고 녹음도 하신다니 충격적입니다.
선생님의 정열 부럽습니다. 언제 선생님의 노래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
|
|
|
|
| 임병문 |
10-11-22 14:50 |
|
김창식 선생님,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그의 창백한 얼굴과 한 곡의 노래마저 버거워 그 말미에는 식은 땀을 흘리던 가수,
결국은 가슴앓이로 요절해 많은 사람을 울렸던 그의 애절한 사연을 이 가을 선생님을 통해
다시 듣게 되었군요.
참으로 낭만적이기도 했던 그 때, 제 젊은 시절이기도 했구요.
그때의 얘기라면 참으로 무궁무진하기도 했고요.
선생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
|
| |
| 김창식 |
10-11-22 15:07 |
|
임병문 선생님도 그런 애틋한 추억이 있으셨군요.
'청맥' 옆엔 '하트 투 하트'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반팔 가로 줄무늬
티셔츠 차림의 김세환이 '사랑하는 마음'을 부르고 있었지요.
|
|
|
|
| 임병문 |
10-11-22 15:10 |
|
김창식 선생님,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그의 창백한 얼굴과 한 곡의 노래마저 버거워 그 말미에는 식은 땀을 흘리던 가수,
결국은 가슴앓이로 요절해 많은 사람을 울렸던 그의 애절한 사연을 이 가을 선생님을 통해
다시 듣게 되었군요.
참으로 낭만적이기도 했던 그 때, 제 젊은 시절이기도 했구요.
그때의 얘기라면 참으로 무궁무진하기도 했고요.
선생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
|
|
| 강승택 |
10-11-22 21:10 |
|
|
오늘 아침 세시봉 4인방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60년대말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활동했던 송창식,윤형주, 김세환에다 MC 이상벽까지 얹어 4인방이라 칭했더군요.이들의 활약으로 60년대말 청년문화의 불을 당기고 한국대중음악의 기틀을 세웠다면 가수 김정호는 그 뒤를 잇는 영혼의 가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나저나 김창식 선생님, 놀랍습니다. 음악, 영화등 장르를 가리지않는 해박한 지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 가을이 참 잘어울릴것 같은 남자, 김창식~화이팅!
|
|
|
| |
| 김창식 |
10-11-23 08:57 |
|
강승택 선생님, 저도 그 기사 읽었습니다. 송창식과 윤형주가 세시봉에서 의기투합했지요.
저는 김정호와 함께 송창식을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 이름과 같군요. ㅎㅎ
|
|
|
|
| 최복희 |
10-12-22 11:58 |
|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신 김창식 선생님!
선생님 글을 읽으며 옛 추억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좋은 글로 칼럼도 계속 연재하시나 봅니다.
대단하셔요.
선생님 글을 대할 때마다 갖는 느낍입니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내어 감상했습니다.
|
|
|
| |
| 김창식 |
10-12-24 11:02 |
|
최복희 선생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지난 번 출판기념회 때 말씀 나누지 못해 아쉽습니다.
새해 뜻하시는 바 이루시고 선생님 댁내 평안과 건승을 빕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