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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박영보 |
날짜 : 10-11-18 10:54
조회 :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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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같은 아들
박 영 보
“어머나, 세상에 얘 좀 봐.” 놀라 소스라치는 듯한 소리다. 누가 또 무슨 일이라도 저질러 놓기라도 했나 싶어 부엌으로 달려가봤다. 플라스틱 박스 하나를 꺼내 들고 서있는 아내. 무엇엔가에 감동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아내가 직장에 나갈 때 수시로 가지고 다니는 런치박스이다. 이날 아침도 도시락을 싸기 위해 여기저기 그 박스를 찾다가 평소에 놔두는 자리에 없자 마지막으로 냉장고를 열어봤더니 그 안에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빈 통이 아니라 각종 야채를 골고루 섞어 만든 샐러드가 담겨 있었다.
사람 하나쯤 감동을 시키는 것은 그리 큰 일도 아닌가보다. 까짓 샐러드 한 통만으로도 사람 하나를 저토록 행복하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각이라는 걸 조금만 해준다 해도 주변을 이처럼 화기 넘치게 해줄 수도 있나보다.
박스 속에는 양상추며 오이, 치커리, 시금치, 토마토와 아보카도 등은 물론 먹기 좋은 크기로 치즈와 햄까지 썰어 넣었다. 종잇장 처럼 얇게 썬 당근과 빨간 무를 곁들여 모양까지 내려고 신경을 썼던 것 같다. 별도의 조그만 플라스틱 통에는 드레싱도 빼놓지 않았다. 쉽고 편리하게 미리 섞어 놓아도 됐을 터인데 야채가 숨이 죽지 않고 신선도가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이 정도면 타운 내의 내노라는 고멧 레스토랑에 갖다 놔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서른이 넘은 작은 아들이 엄마를 위해 정성을 들여 만들어 놓은 점심 도시락. 신경을 써가며 만들고 있었을 녀석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저렇게나 좋고 흐뭇할까. 잔뜩 들떠 홍조를 띄우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과연 그 샐러드가 엄마를 위한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 행여나 아내가 김치 국부터 마시며 혼자 좋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녀석도 일을 나갈 때 가끔 점심 도시락을 싸가기도 한다. 바쁜 시간에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갈 시간이 없을 때 시간 절약을 위해서이다. 어쩌면 그 샐러드가 엄마를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진하게도 기뻐하며 감격스러워 하는 아내의 들떠있는 기분을 잡치게 하고싶지가 않아서였다. “당신 아들은 꼭 딸 같이 자상해~”라며 한 술을 더 떠가며 “그런 아들을 둔 당신은 참 좋겠네. 뉘 집 딸들이 엄마를 위해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라거나 “며느리인들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라며 계속 입을 놀려대는 것도 딴에는 이런 분위기에 초를 치고 싶지가 않아서이기도 했다.
아침 여섯 시가 지나 아내가 출근을 하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갔다. 녀석이 가져 가려고 준비해둔 것을 엄마가 가지고 가버린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똑 같은 종류의 통에 똑 같은 분량 그리고 똑 같은 재료와 모양의 샐러드 한 통을 만들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그날따라 열한시가 되도록 일을 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컨설팅 일을 하기 때문에 일정한 출퇴근 시간이 없고 가끔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일을 할 때도 있다. 이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으니 런치박스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녀석이 만들어 놓은 샐러드는 순전히 엄마를 위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능청스럽게 “나는 네가 샐러드를 만들어 놔서 오늘도 일을 나가는 줄 알았다”니까 “그럼 엄마가 그거 가지고 가지 않았어?”라며 깜짝 놀라는 기색이다. 엄마를 위해서 만들어둔 것이란다. 내 속에서도 스물거리고 있는 감동같은 것이 확인되고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샐러드로는 녀석과 나의 점심상 한쪽을 장식하게 되었다. 아내가 퇴근한 후 이 샐러드에 관한 이야기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반복돼가며 이어지기도 했었다.
승부근성이 지나쳐 형제간에도 단 한발자국의 양보도 없던 녀석의 어린 시절이었다. 자기 뜻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스스로를 제어하지도 못하던 불같은 성격의 아이였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형제간에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도우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딸을 가진 이웃들을 부러워하던 우리 부부이기도 했었는데 두 아들이 딸들의 역할까지 해주고 있으니 고맙기도 하다.
‘딸 같은 아들’. 아내가 가끔 이 아이에 대하여 하는 말이다. 이렇게 정겹고 아기자기한 면이 있기 때문이리라. 부엌의 개수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 곁을 맴돌며 속닥거리는 광경이 자주 목격되기도 한다. 마치 다정한 모녀간에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시스터 보이’라고 할 만큼 매사에 소심하고 여성스럽다는 뜻은 아니다.
포용력이 있고 자기 책임을 미루려 하지도 않는다. 밖에 나가면 리더십도 있다. 말보다는 생각이 앞서고 행동화 하는 것은 그 다음의 순서로 정하는 신중함도 있다. 수년째 이어온 운동으로 팔뚝과 가슴팍의 근육은 돌덩이처럼 단단하다. 요샛말로 ‘식스 팩’이라고 하던가. 웃옷을 벗어제키면 근육질 가슴 밑으로는 네모꼴로 나누어 줄을 긋고 있는 여섯 조각의복근. 어쩌다 부자 간에 힘 자랑을 하려다 손목이 잡히면 몇 초 만에 항복을 해야 한다.
성격상의 차이이겠지만 과묵한 성격의 큰 아이가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내면적으로 심사숙고를 하는 편이라면 작은 녀석은 속도 깊지만 겉으로도 자상하고 세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이 각각 다른 성격은 서로간의 부딛힘을 없애고 오히려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딸이 없이 두 아들만 있는 집안이 얼핏 삭막한 느낌이 들 때도 없지 않았다. 딸이 있는 집안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엄마에게 딸과 같은 말 동무까지 돼주는 아들이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는 것이 아내의 말이기도 하다. 삼 십대 총각 아들이 자기 엄마를 위해 샐러드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가며 흐뭇해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다 보는 것도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부모의 보호막에서 벗어나 각자대로 삶의 바탕을 다져가는 그들을 대견해 하거나 고마워 해오던 우리. 이젠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보호막 속으로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면 민망스럽기도 하다. 시간의 빠른 흐름. 아무런 사전 연습도 없이 초늙이의 흉내부터 내고 있는 것 같은 쑥스러움. 이럴 때 부모로서도 그들에게 무슨 기쁨이나 감동같은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의 다른 기대나 욕심같은 것을 부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샐러드 한 통이 가져다 준 뿌듯한 온기가 이 집안에 남아 감돌고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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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행원 |
10-11-19 1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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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보 선생님, 훈훈한 家族愛가 물씬 나는 좋은 작품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배려(consideration)는 인생에서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합니다.
가장 소중한 마음가짐이기도 하구요.
그런 큰 마음을 가진 아들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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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0-11-20 1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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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보 선생님! 글을 읽으면 먼저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풍기고 멀리서 날아온 글이기에 더욱 더 반갑게 느껴옵니다.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보통이 아니시죠? 어떻든 아들을 통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슴에 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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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0-11-30 08: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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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작가회 홈에 들르지 못했습니다.
좋은 글 남기셨군요.
살가운 아드님을 두셔서
열 딸 부럽지 않으시겠어요.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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