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힘
최 원 현 / 崔 元 賢
nulsaem@hanmail.net
현관문을 나서는데 몸에 부딪혀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보니 아내가 신발장 앞 바구니에 담아 놓은 감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바삐 나서는 길이었지만 떨어진 것을 주워 바구니에 넣으려는데, 보통 감자 같지가 않다. 싹이 나 있는 것이다.
흙에 심겨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싹을 틔우기 위해 물에 담가 놓은 것도 아닌, 바구니에 그냥 담아 놓은 것인데 어떻게 싹이 났을까. 그거 하난 줄 알았는데, 바구니에 담겨 있는 것 모두가 다 싹이 나 있는 게 아닌가.
신기했다. 먹기 위해 잠시 담아 둔 바구니에서, 말하자면 싹을 틔울 만한 조건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런 가운데서도 죄다 싹을 틔운 감자를 보며 생명의 신비를 본다. 그러고 보니 싹도 아무 데서나 난 게 아니다. 타원형의 둥근 몸 어디서건 싹은 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가만 살펴보니 싹이 틀 생명의 눈이 있는 곳에서만 싹이 나온 것이다.
소롯이 올라온 감자 싹, 두 개만 쏭긋 올라온 손녀의 젖니처럼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생명력이란 이렇게 위대한 것이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한갓 식물에게도 살아있다는 것은 저만큼 소중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인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말해 무엇 하랴.
손주가 생기면서 내 마음이 더 여려진 것 같다. 이제 두 돌을 넘긴 아이, 갓 돌을 넘긴 아이, 돌을 세 달 앞두고 있는 아이, 세 아이들을 보면서 제각기 풍겨오는 그들만의 고유한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본다. 그러면서도 미안하긴 하지만 화상통화로 매일이다시피 보는 미국에 있는 아이보다 가까이 있어 자주 보는 아이에게 더 사랑이 가고 느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 문득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마치 바구니에 담아놓은 감자에서 싹이 나게 하던 어떤 특별한 섭리가 태어나게도 자라게도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 놔두어도 저절로 자란다는 말은 아니다. 매사를 내가 다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나름의 결론인 셈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달아지는 것도 바로 순리인 것 같다. 사실 내 삶에서도 나는 늘 보조자였다. 그것을 이제야 안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번도 가르쳐 주지 않은 말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했다.
얼마 전이었다. 딸네 식구가 집에 와서 자는데 두 돌 지난 손녀를 내 방에서 재우려고 방의 불을 껐다. 그런데 몇 마디 겨우 하는 아이가 ‘무서워’ 하는 게 아닌가. 거기다 ‘안 보여’까지 했다. 얼마나 놀라고 신기했는지 모른다. 그 어린 것이 어떻게 그런 상황에 맞는 말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놀랍기만 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처럼 쉼 없이 변하고 발전하는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임을 미처 모르고 살았음이다.
바구니 속 감자를 뒤적여 보면서 싸아한 아픔이 온몸을 감싸는 걸 느낀다. 말라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책이 싹을 내는 것이었구나.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있음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음이구나. 아니 없어지고 말 수도 있는 자신을 이렇게 남기려 한 것이었구나. 손에 든 감자의 여린 싹이 흐느끼며 내게 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또 하나 있다. 언젠가 구족 화가들의 작품 전시회에서 오싹 등에 식은땀이 나던 경이로움을 맛보았었다. 발이나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의도한 곳으로 붓을 한 번 움직이기 위해서는 온몸의 조직이 있는 힘을 다 모아야만 가능한 숭고한 협력 속에 태어난 작품들이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들였을 그들의 힘과 땀과 눈물과 정성, 차마 마음 가벼이 바라볼 수도 없던 안타까움과 감격이 마른 감자가 틔워 낸 싹에 오버랩 되어 지금 내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조금만 눈과 귀를 세심히 하여 듣고 바라보면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여리고 작은 싹이 터오는 소리도, 그 미세한 움직임도 생명의 몸짓이요 살아 있음의 소리가 아닌가.
세상이 살아 있다는 것은 이처럼 생명의 힘들이 살아 있음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살아있음이 아름답고 그런 생명의 힘이 세상을 또 아름답게 함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