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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그릇 /박원명화


이사 와서 여러 해를 보냈다.
그땐 제법 넓던 집안이 갈수록 졸아드는 느낌이다. 소유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사재기만 한 탓이다. 곳곳에 물건들이 넘쳐난다. 구석구석을 채우고 또 채워도 언제나 밑 빠진 독처럼 허전하다. 어느새 궁핍을 잊고 물질만능의 물결 속에 다함없이 휩쓸려 살다보니 줏대 없이 통만 커진 것 같다.
싱크대를 정리하다 귀퉁이에 웅크린 유리그릇 하나에 눈길이 간다. 바랜 듯 희미해진 무늬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처음의 신비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마냥 침묵 속에 밀쳐져 있었다. 선명한 빛깔을 그대로 지탱하기엔 너무나도 긴 세월인 듯. 오래 된 그 유물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쳐본다. 아직도 어머니의 투명한 삶이 거기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 듯하다.
그 그릇은 내가 시집올 때, 어머니가 물려준 것이다. ‘유리그릇처럼 늘 투명하게 살아야 하느니’라고 하며 깨지지 않도록 곱게 싸고 또 싸서 내게 안겨주었다. 거기엔 어머니의 애달픈 사연이 담겨있었다. 그 그릇은 어머니에게 삶의 희망이었고 기다림의 증표였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 난 건 13살 때였다. 아버지의 나이는 12살, 막내로 자란 탓인지 밤낮없이 할머니만 파고드는 철부지였다. 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참고 기다려야만 하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어머니는 열 살도 되기 전에 부모를 여의고 작은 아버지 댁에서 자랐다. 신랑이 돌아보지 않아도 선뜻 발길을 돌릴 친정이 없었다. 5년 남짓을 부엌대기처럼 일만 하는 그런 시집살이였다. 하루는 할머니가 “아가야 너 고생을 생각하면 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구나. 네 신랑이 철들라면 아직 먼 모양이다. 어렵겠지만 얼마동안만이라도 어데 나갔다 오면 어쩌것냐” 하고 안타까워했다. 할머니의 간곡한 말씀을 어쩌지 못한 어머니는 이웃의 소개로 방직공장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했다. 내면에 감춰진 아픔을 삭이며 시키는 일에만 몰두했다.
혹독한 수련기간이 무려 석 달, 그리곤 첫 월급이란 걸탔다. 난생 처음 받아 본 거금 5원! 어머니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받은 돈으로 시부모에게 드릴 벽시계와 유리그릇 하나를 샀다. 투명한 유리에 매력을 느꼈지만 그게 볼수록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자신의 처지를 닮은 것 같았다. 문득 그 집 귀신이 못되고 소박이라도 맞는 게 아닌지 두려움이 일 때면 그 그릇에 맑은 물을 떠놓고 ‘제발 소박맞지 않게 해달라’며 치성을 드리곤 했다.
쉬는 날엔 유리그릇을 꺼내 닦고 또 닦았다. 그릇은 눈처럼 반짝거렸다. 윤이 나는 만큼 소망한 일들도 언젠가는 환해질 것으로 믿었다. 어머니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자신의 가냘픈 숨결을, 여린 마음을, 간절한 소망을 그 속에 담았다 쏟아내곤 했다. 그러기를 3년여, 정성이 녹아든 것인지 어느 싱그런 봄날, 아버지가 찾아와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집에 와서도 어머니는 그 유리그릇을 보물단지처럼 선반 위에 모셔두었다. 그것은 언제나 어머니의 삶에 윤활유가 되었다. 삶이 힘들거나 갈망하는 게 있으면 유리그릇에 맑은 정한수 떠놓고 뒤꼍 장독대로 나아가 치성을 드리곤 했다. 군인 간 큰오빠 무탈하라고, 병고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낳게 해달라고, 지극정성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신앙은 아니었지만 기쁜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우리 가족의 평안을 주며 어머니와 평생을 같이 했다.
나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유별났다. 태어나 열이레 만에 아버지를 여윈, 그래서 아비사랑 받아보지 못한 나에 대해 측은지심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어려서부터 병약한 막내딸에 대한 애처로움이 유별난 자정慈情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그 그릇을 내게 물려주고 싶었는지도. 그릇은 무릇 밥이나 찌개나 물을 담는 도구로만 생각했다. 그런 도구로만 여긴 것이라면 수십 년 전 공장 직공으로 어렵게 번 돈으로 어머니가 사들이기나 했을까?
어머니의 심중을 알 턱이 없는 나는 물려준 그릇을 어찌 쓸지 몰라 그동안 보관만 해온 셈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빛이 바랜 그 유리그릇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고 양질인 그릇들이 싱크대 언저리에 가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아한 자태를 자랑해줄 것이 많으니 어머니의 유리그릇은 퇴출당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다시 만난 그것은 그런 도구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소박을 맞아도 갈 곳도 없는 처지에서 마치 소박맞은 여인처럼 시집을 떠나 공장 직공 3년의 망막한 세월을 보내며 시집의 처분만 기다렸었다. 그때의 슬픔과 고통을 스스로 달래게 해주고 위안을 준 도구가 그 유리그릇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먼 훗날 군에 간 오빠와 병든 아버지와 그리고 병약한 딸을 위해 엄마의 간절한 소망을 비는 제기(祭器)가 되었다.
그릇은 본래 밥이나 찌개나 냉수 한 그릇 담는 용기로 제작되었겠지만 어머니가 사들인 후부터 그것은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되어 지금 내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유리그릇도 역시 어떤 것을 담는 용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작은 그릇을 들여다보면 어머니의 한 많은 긴 세월이 담겨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세월을 말해주는 유리그릇의 전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지혜가 되고 채찍이 되고 항상 곁에 머물러 주는 스승이 된다. 그런 따뜻한 마음이 담긴 그릇에서 나는 어머니의 호흡을 느낀다. 생명에 대한 외경과 고통의 연민에 이어진 사랑 같은 것을 그 속에서 배운다.
마음의 때를 벗기듯 새삼 그릇을 닦아본다. 깨끗이 닦고 나니 유리그릇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다. 마치 삶의 찌들었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듯하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나도 맑고 투명한 유리그릇에 정수기 물을 담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묵상한다. 유리그릇처럼 나 또한 맑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세상에 모성만큼 질긴 사랑이 또 있을까. 어머니는 타계한 후에도 유리그릇을 통해 여자의 삶에 대한 도리를 내게 보충수업까지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가까이 있을 땐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인생을 한고비 넘긴 지금에서야 겨우 그 깊은 심정을 헤아리게 되니 새삼 사양 노을이 아름답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