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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0-03-07 19:28
조회 :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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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愧)
김창식
1960년대 후반, 나는 심약한 대학생이었다. 학원가는 독재정권 반대 시위로 술렁였다. 어느 날 등굣길에 교문 밖으로 뛰쳐나오던 데모대에 휩쓸렸다. 소심한 청년은 대열 후미에 몸을 숨긴 채 건성으로 구호를 외쳤다. "삼선개헌 결사반대!" 시위 참가 경험을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김태길의 수필「대열(隊列)을 읽은 때문이었다. 화자는 건물 2층에서 주장이 다른 두 무리의 사람들이 시위 벌이는 것을 본다. 그들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며 결단을 촉구한다. 화자는 망설이다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순간 꿈을 깬다. 마지막 구절. '1974년도 다 갔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정말 고개를 들 수 없는 한 해였다.' 험난한 시절 지식인의 고뇌와 부끄러움이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가 스크럼을 짜고 전진하자 도열한 경찰을 비집고 우두머리가 나타나 설득했다. "선량한 지성인들은 제발 학원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우린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아갔고, 경찰은 그만큼 거리를 두며 물러났다. 소방서를 지날 무렵 경찰 저지선이 후진을 멈췄다. 방독면을 쓴 일단의 무리들이 앞으로 튀어나와 좌우로 정렬하더니 '퍽퍽' 최루탄을 쏘아댔다. 갑자기 서장의 말투가 험하게 바뀌었다. "새끼들 다 죽여!" 순간 소방서에 숨어있던 매복조인 백골단(白骨團)이 후미를 들이쳤다. 데모대는 순식간에 흩어졌고 나는 동료들과 뒤엉켜 길가 철물점 안으로 도망치다 체포되었다.
유치장에서 하루를 지낸 뒤 학교에 가니 밤사이에 영웅이 되었다. 남학생들은 다투어 악수를 청하고 여학생들은 '성배(聖杯)의 기사(騎士)'를 대하듯 책과 노트를 한 아름 가슴에 껴안은 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넨 참 용기 있는 사람일세!" 교수님도 등을 두드려 격려해 주었다. 파리한 안색의 모범생 타입 학생이 데모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뜻밖이어서 놀람이 더했을 것이다. 처음엔 난 당연히 부인하였다. 그러자 이번엔 겸손하기까지 한 젊은이로 둔갑하였다. 도망치려 철물점 새시를 쥐어뜯다 붙잡힌 치욕스러운 포로는 데모대를 이끌다 격렬한 저항을 펼친 투사가 된 것도 모자라 겸양의 미덕을 지닌 청년이 되었다.
남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든 마음속 부끄러움은 한 동안 나를 짓눌렀고, 언젠가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몇 년 후 때가 왔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일―10월 유신―이 일어난 것이다. 세상이,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정작 때가 되었을 때 나는 단풍진 가을 산 철책 선에서 한료(閑廖)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중, 군인 신분이었음을 다행으로 느꼈다. 학생이었다면 과연 시대의 격랑에 몸을 띄우고 불의에 맞설 수 있었을까? 스스로의 물음에 자신이 없었다. '현장부재증명'은 또 다른 구차한 방호행위일 수 있었다. 앞의 부끄러움이 오해에서 비롯한 외부적인 것이었다면, 나중 것은 내부에서 발화한 것이었다. 부끄러움은 가중되었으며, 대학생활 내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했다. 칠면조의 목 줄기처럼 질긴 참괴(慙愧)함이었다.
사회 진출 후에도 부끄러움을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체득한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자신을 되돌아보았고, 그것과 더 이상 불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자괴의 념(念)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 못하면 자신이 초라해 질뿐, 발전이 없으니 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인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의 정서에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깨달음의 선행감정이고, 깨우침에서 비롯한 성찰은 종종 새로운 지혜의 발견과 용기 있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부끄러움 극복을 위한 노력은 자기계발은 물론 새롭고 낯선 창조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큰 위인으로 우러르는 성(聖) 아우구스티누스, 톨스토이, 루소가 참회에 대한 저작을 남겼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쳤는데, 그것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들도 보통사람처럼, 아니 보통사람보다 더욱 큰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통렬한 반성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에 힘입어 인류의 정신사에 찬연한 빛을 던지고 인류의 스승이 된 것이 아니었던가.
부끄러움을 천착한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서시」,「별 헤는 밤」의 윤동주 시인이다. 20대 초반의 어린 청년은 무엇이 그다지도 부끄러웠을까.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언어라는 소극적 수단으로 저항을 표출할 수밖에 없음에 갈등을 느꼈음직하다. 가만, 그의 부끄러움은 보다 더 근원적인 것과 맥이 닿아 있었음에 틀림없다. 다름 아닌, 나라의 빼앗김 자체를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것이 갓 피기 시작한 청년 한 사람의 잘못일 수 없으련만,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고 항거, 순교하였다. 나라의 되찾음은 그와 같은 선열들의 노력에 힘입어 앞당겨진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는 시대를 앞서간 것이며,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음으로 해서 시간의 절대적 권위를 발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시간 앞에 인간은 초라하다. 시간은 여일하나 인간은 개체(個體)로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존재의 종결인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 하이데거(Heidegger)가 명저「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갈파하였지만, 유한자(有限者)로서의 인간의 숙명과 존재의 불완전성은 과연 시간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하나, 아니 그러므로, 범인(凡人)과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 위인들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닐까. 시간에 함몰되느냐, 결과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관여하고 시간을 창조하느냐.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성현들이 보여준 전범(典範)적 삶에 다가갈 수 있는 현실적 실천 요강은 어떤 것일까? 그 같은 삶은 마음의 밭을 가꾸어 자기실현을 이루는 한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류에 기여하는 삶일진대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거나, 때로 안일함과 편리함을 뒤로 한 채 해야 할 일을 하는 고뇌에 찬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버거운 짐을 지고 일상을 견디어 내야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익숙한 패러다임을 선뜻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리라 여겨진다. 우선 순리와 자연스러움을 좇아 삶의 결대로 살며,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 때때로 멈추어 서서 내가 지금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지 않은지 비추어 보거나, 자신의 이(利)를 위하여 이웃의 삶을 외면해온 것이 아닌지 자기검열을 해 보는 습관을 갖는 것은 실용적이고 진정성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압축 성장시대를 살아온 탓인지 도덕성보다 개인의 영달과 부의 축적을 앞세우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었다. 일류 학교, 좋은 직장, 멋진 결혼, 고급 승용차, 주거 지역과 아파트 평수가 우리 삶의 목표와 관심사로 떠오른 요즈음이다. 이러한 것들의 소유와 성취는 남에게 보이는 것이며, 순도 있고 지속적인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의 와중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소외된 이웃, 사회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응시하여야 하는 소이(所以)며, 우리 또한 그에 대하여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남부럽지 않은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준거(遵據)로 삼아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개선해 나간다면 인간 존엄의 회복과 인간성의 고양이라는 궁극의 목표에 나도 모르게 한걸음 다가서고 소박하게나마 시간의 흐름에 관여하는 삶을 살게 될 터인데…….
*에세이 플러스(2010. 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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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0-03-09 1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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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오늘 컴퓨터를 새로 샀는데 엄청 빠르고 좋으네요 인터넷이 새로 산 컴퓨터로 첨으로 글을 올립니댜. 저는 시위문화와 너무나 익숙합니다. 제가 84년 서울 구치소 전입된 후 85년 부터 터진 미문화워 사건 건국대 시위사건 뭐뭐 할 것 없이 다 겪었습니다. 그 덕분에 수당도없는 근무를 출근해서 퇴근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으니까요 어려운 시절 그시절이 떠오릅니다. 고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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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3-09 2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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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컴퓨터 새로 사셨으니 이제 날개를 다신 셈이군요. ^^
저의 시위 경험은 오래 전이었고 사실 많이 참여해보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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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
10-03-10 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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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은 수치가 아니라 나를 맑게 해 주는 거울이라 생각합니다. 닦지 않은 거울로 비쳐보면 내 모습은 그냥 아름다워 보일 수 있지요. 그러나 깨끗이 말게 닦은 거울에 보면 주름살도 못 생긴 부분도 잘 보이지요.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는 수필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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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3-10 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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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현 선생님 말씀 깊이 공감합니다. 마음의 거울 부지런히 닦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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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10-03-11 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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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모르지만
김창식 선생님께서는 짜임새있는 삶을 엮어오신 듯
선생님을 향한 시선에는 늘 정답기만 한걸요.
60년대에 새마을운동으로 시작된 국가재건에 있어
우리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훌륭한 걸작이었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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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3-11 1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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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의 결론공감합니다, 양순태 선생님.
다만, 짜임새있는 삶이 아니라 불균형한 삶을 살았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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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3-13 1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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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나약한 뒷 그림자, 그 허전함,,,급공감입니다. 문학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도래되는 시기에 생각은 유한자에서 다시 니이체로 옮겨 갑니다. 20대 머릿속을 지배하던 용기없는 비굴함이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독자없는 글을 끄적이며 자괴에 빠지게 하고 있으니...
김창식선생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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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3-14 0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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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주 선생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일깨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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