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오늘 방문자수 |
    |
| 어제 방문자수 |
 |
| 최고 방문자수 |
|
| 방문자수 누계 |
  
|
|
|
|
|
|
|
|
|
|
|
|
|
|
| 글쓴이 : 이언주 |
날짜 : 10-03-04 09:02
조회 : 2184
|
|
|
|
학교에서 진학상담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성격을 생각해 입학이 안정된 학교를 권했지만, 평소 고분고분 자라주던 아이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학교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는다. 언제가 친구로부터 들었던 ‘자식 말썽질량 불변의 법칙’이란 말이 떠오른다. 어떤 아이든 부모에게 부릴 말썽의 양은 누구나 동일하다는 말이란다. 어릴 때 속을 썩이고 애를 태운 아이는 그만큼 철이 빨리 들고, 조용히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라도 기어이 남은 말썽을 부리고 만다니 화제가 되는 ‘엄친아’나 ‘엄친딸’을 그렇게 부러워할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이어서 아이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막막한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버지 생각이 났다. 어느새 아버지와 내가 붕어빵처럼 닮아 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한 적이 있었다. 진정으로 자식을 위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주고, 자식이 힘들어할 때는 따뜻한 품으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모가 되어 보니 그른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없고, 아이의 몫은 아이의 몫일 뿐 정작 내가 해 줄 일이 별로 없다. 대신 나설 수 없으니 믿고 지켜볼 수밖에.
무엇을 그려야 할지,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도화지를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아버지의 그림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는 내가 사범대학을 진학하기를 바라셨다. 졸업과 함께 직장이 보장되기도 하겠지만 여자 직업으로는 교사만한 것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나는 그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 몰래 입학 지원서를 내고 경영학과 입학통지서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어의가 없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불벼락보다 더 견디기 힘든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담담한 얼굴로 나를 불러 앉히고 굳은 표정으로 미리 준비해둔 등록금이 담긴 흰 봉투를 꺼내주셨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인생을 그릴 도화지다. 여기다 무엇을 그릴지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행동해라. 이제 이 도화지는 완전히 네 몫이다”고 말씀 하셨다.
그 시절 대학은 끓고 있는 팥죽 솥 같았다. 불안정한 시국으로 연일 학내에선 정치적 집회가 열렸고, 경제상황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져 졸업 후 미래는 막막하기만 했다. 열정만으로 그려지는 나의 도화지는 잦은 실수로 인해 덧칠되기 일쑤였고 이념의 벽에 부딪쳐 반항 하면서 아버지 설득은 기성세대의 변명으로만 생각했다. 길이 보이지 않을수록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고, 밑그림을 보여주려는 부모가 괜한 참견을 하고 있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내 인생의 도화지에는 나 혼자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런 나를 지켜만 보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밤 뒤척이는 내 머리맡에 앉으셨다.
“네 가슴에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있다. 너는 지금 희망이 있어 꿈을 꾸고 살고, 나는 어제고 오늘이건 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서 어제보다 편안한 오늘이 더 중요하다.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고 살아야 하는 아빠를 비겁하다고 말하겠지만, 늙어가는 나는 한창 크는 내 아이들을 위해 변화보다는 안정이 더 필요하다. 시간이 흐르면 너도 이해하게 되겠지만…”
아버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셨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목구멍으로 뜨거운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까지 부모의 희생은 자식을 위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한 아버지의 등을 본 순간 더 이상 내 주장만 내세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미래와 이상만 좇아가던 내게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졸업을 하자 아버지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입사 지원서를 구하러 다녔지만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회사마다 지방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여성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지는 않았다. 직장을 구한 친구들은 모두 사범대학을 졸업 했거나, 교직을 이수해 교사가 된 경우뿐이었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그림 앞에서 힘들어하는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 심정이 어떠했을지 이제야 그 마음이 헤아려진다. 그때 나를 믿는다며 아버지는 좀 더 공부를 할 기회를 주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힘들게 고학을 했지만 끝내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꿈을 접은 아버지는 자녀교육만이 장래에 대한 투자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동네에서 인색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까운 이웃과 막걸리 한 사발 나눌 여유를 갖지 못하고 살았다. 훗날 교육공무원으로 임용을 할 때 신원보증서와 제출서류들을 챙겨주시던 아버지는 내게 축하한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던 도화지엔 세월이 흐르면서 나만의 색깔로 여백 없이 가득 채워져 있다. 돌이켜보면 이 그림은 나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못다 이룬 젊은 꿈을 담아 놓은 것이고, 아버지의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내 등에 날개를 달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소나기를 피하는 우산이 되어 주기도 했다.
어느새 인생을 그릴 빈 도화지를 준비하는 일이 내 차례가 되었다. 아이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내 속을 끓이면서 도화지위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기를 번복할 것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지식으로 나도 아이의 도화지에 밑그림이라도 그려 넣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그림을 완성할지 아버지처럼 나도 묵묵히 믿고 기다려보아야겠다.
|
|
| 임재문 |
10-03-05 11:25 |
 |
|
이언주 선생님! 아버지의 도화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넘어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지금도 저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 길을 가고 있는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아버지의 그늘만한 것이 어디 있던가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오늘따라 목메이게 그리워집니다.감사합니다.
|
|
|
|
| 임병문 |
10-03-05 13:03 |
|
이언주선생님.
' 정작 부모가 되어보니 그른 것을 옮다고 말 할 수 없고, 아이의 몫은 아이의 몫일 뿐.' 이라는 그 말, 누구나 부모가 되어 한번쯤은 느끼는, 아니 평생을 느끼며 살아야하는 가장 절실하고 허허로운 부모의 심정일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이런 부모의 착찹한 심정이 바탕이 되어 우리 삶의 그림은 이어지고,
그것이 결국 역사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삶속에서 받아들어야하는 도화지는 아버지도 아이도 내용과 상황만 다를 뿐,
오늘도 내일도 이어져 가는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이것으로하여 사람이란 결국 만각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찰의 모습, 그리움의 모습,
특히 엄마의 그런 모양은 언제나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
|
| 이진화 |
10-03-05 23:53 |
|
|
이언주 선생님, 생각컨데 자식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는 것 같습니다. 묵묵히 등을 보이며 앞서 가신 아버지가 계셨기에 오늘의 이언주 수필가, 시인이 있는 것일 테지요. 인내와 고통 속에 오래도록 기다려주신 모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
|
|
|
| 박영보 |
10-03-07 21:54 |
|
|
그리다가 구겨 버리기만을 반복해온 세월이었습니다. 그 도화지는 아직까지도 완성 시키지 못하고 있지만 그 종이를 아주 치워버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그림은 그려보겠다는 여백은 남겨놓고 싶은가 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
|
|
|
| 최원현 |
10-03-10 09:21 |
|
'어느새 인생을 그릴 빈 도화지를 준비하는 일이 내 차례가 되었다.'
그게 삶이 아니던가요. 시간은 결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 법, 우린 그걸 그걸 너무 늦게 깨닫곤 하지요. 그래도 이언주 선생은 빨리 깨달은 거네요. 그걸 깨달으니 다 놓쳐버린 후가 더 많은데.
|
|
|
|
| 김창식 |
10-03-14 09:23 |
|
|
아버지와 따님의 모습은 우울하지만 선연한 시대의 초상으로 느껴집니다, 이언주 선생님,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