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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류인혜 |
날짜 : 14-08-02 08:50
조회 : 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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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시대》57호, 2014년 7/8월호
여름밤 친구
류인혜
innhea@hanmail.net
예년보다 일찍 더워진 날씨에 집안에서 지내며, 연암 박지원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연달아 읽었다. 옛사람의 자취는 그들이 남긴 글에서 미루어 짐작한다. 연암의 행적을 쫓아가며 이런 저런 글을 비교하며 유추해보다가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다. 연암은 1768년 백탑白塔 부근으로 이사와 1771년까지 거주했다. 이웃에 이덕무를 비롯하여 서상수, 유금, 유득공, 이서구 등 이른바 ‘연암 일파’로 뭉치게 되는 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 박제가는 열아홉 살 때, 당시 서른두 살의 연암을 만났다.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모였다하니 남자들의 우정도 만만치 않다. 자주 모여서 시문을 읽기만 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무엇에 집중하여 마음을 풀고 맺었을까……, 궁금함을 따라가 본다.
연암이 여름밤에 그 벗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한양거리를 헤매고 다닌 이야기는 여러 편이 있다.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의 때는 음력 칠월 열사흗날, 모인 인사가 박제가의 적형 박제도薺道, 성위 이희경, 성흠 이희명, 약허 원유진, 무관 이덕무, 원덕 서유린 등 동자까지 7~8명이다. 서른일곱의 연암보다 나이가 적은 20~30대의 혈기왕성한 사내들이다.
그들은 연암이 살고 있는 전의감동을 출발해서 오십 전어치의 술을 사서 나누어 마시고 운종가 종각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다. 멀지 않는 현현玄玄의 집을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운종교대광통교를 거닐다 다리난간에 기대어 6년 전 대보름날에도 연옥이 운종교 위에서 춤을 추었고, 백석白石의 집으로 가서 차를 마셨고, 혜풍유득공이 거위 목을 끌어안았던 이야기를 나눈다. 일행은 이윽고 수표교에 당도하여 다리 위에 줄을 지어 앉아 하늘을 보며 맹꽁이소리와 매미소리, 닭울음소리를 듣는다.
연암이 워낙 술 마시기를 좋아하긴 했어도, 어쩌자고 이들은 여름이면 밤중을 지나 새벽까지 떼를 지어 길을 헤매었던가! 서둘러 얻어 쓴 장옷자락이 밟히더라도 끝까지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현재의 서울, 우리 집 앞에는 길게 산책로가 나있고, 운동기구가 설치된 곳이 있어 살펴보면 여덟 종류의 기구를 각각 사용하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밤중까지 끊이지 않는다. 팔을 빙빙 돌리고,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고, 허리를 좌우로 돌리거나 꺾어 눕히고…… 본인은 심각하지만 관찰자로서는 운종교 위의 춤판처럼 재미있는 구경거리다. 때가 달밤이라면 ‘달밤에 체조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현상이다.
연암의 글, <한여름 밤의 음악회(하야연기夏夜讌記)>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내용은 남산 기슰에 있는 홍대용의 집 유춘오留春塢에서 가졌던 음악회이야기다. 글을 읽으면 선비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흥을 돋우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음악을 좋아하던 홍대용의 집에서는 자주 그런 모임이 열렸다.
밤에 풍무김억가 왔다 했으니 연암이 그 집에 도착한 때는 아마 저녁나절이 아니었을까. 여름땡볕이 지난 후 국옹과 둘이서 슬슬 걸어가며 오늘을 또 무슨 흥겨운 일이 있을까, 숙덕거렸을 것이다. 네 사람이 모여 집주인 담헌이 가야금을 타고 풍무는 거문고로 곡조를 맞추고, 국옹은 가곡을 불렀다. 흥에 겨운 국옹이 한창 노래를 부를 때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옷을 풀어 헤치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 몰두하였다. 눈 밝은 연구자들도 국옹이 누구의 호인지 모른다니, 그 누구인지도 모르는 무아지경의 선비를 궁금한 눈빛으로 봐준다.
김수항의 손자이며, 김창집의 아들인 교교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 1702~1789도 음악과 시문이 어울린 자리에 함께 했다. 김용겸이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성대중이 쓴 <유춘오에서의 음악회를 적다記留春塢樂會>에는 김공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여러 악기가 한데 어울려 곡조가 그윽하고 절묘한 경지로 접어들자 김공이 자리에서 내려와 “하늘나라의 음악이니 늙은이가 어찌 한 번 큰절하는 것을 아끼겠는가?”라며 큰절을 하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그들의 즐거운 여름나기를 엿보며 느낀 것은 연암과 그 친구들의 심성은 어린이들처럼 천진하다는 사실이다. 김용겸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이런 대목도 있다.
이윽고 교교공이 일어나 방문을 나가시더니, 한참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가 살펴봐도 공은 보이지 않았다. 담헌이 선군께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의를 잃어 어른들을 돌아가시게 했을까 염려되네.”
마침내 함께 달빛 아래로 걸어서 교교공의 댁으로 향하였다. 수표교에 이르니, 그때 마침 큰 눈이 갓 개어 달빛이 더욱 환했다. 공은 무릎에 금(琴)을 비껴 얹고, 두건을 벗은 채 다리 위에 앉아 달빛을 바라보고 계셨다. 모두들 놀라 기뻐하며, 술상과 악기를 옮겨와 펼쳐놓고 공을 모시고서 노닐며 즐거움을 다한 뒤에야 파하였다. - 정민지음《미치면 미친다》에서
이 글은 때가 겨울이다. 그러나 모두의 마음은 여름날처럼 뜨겁다. “마침 큰 눈이 갓 개어 달빛이 더욱 환했다. 공은 무릎에 금琴을 비껴 얹고, 두건을 벗은 채 다리 위에 앉아 달빛을 바라보고 계셨다.” 처음 이 대목을 읽었을 때, 황홀했다. 삶을 누르고 있던 권세와 욕망을 벗은 맨머리로 다리 위에 앉아 무심히 달빛을 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 그런 침묵과 소박한 여유를 배우고 싶다.
연암은 몸집이 비대해서 더위를 몹시 탔나보았다. 그는 무덥고 모기와 파리가 많고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운 곳을 피해 서울에서 혼자 여름을 난다. 소완정은 이서구의 당호이다. 그가 연암을 방문하고 쓴 글이 <여름밤 벗을 방문하고 와>이고, 연암이 그것에 답한 글이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소완정이 쓴 글에 답한 글>이다.
"내가 본래 몸집이 비대해서 몹시 더위를 타는데다가 또 풀과 나무가 울창해서 여름밤의 모기와 파리 떼도 두통거리이려니와, 논에서 개구리 떼가 밤낮없이 울어대는 것도 지겨워서 여름만 되면 늘 서울집으로 피서를 오곤 했다. 서울집이 비록 낮고 좁아터졌지만 모기나 개구리 때문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혼자 조용히 살자니 마음에 한 가지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가끔 시골집에서 오는 편지를 받더라도 다만 평안하다는 글자나 훑어보고는 팽개쳐 두었다. 이러다 보니 거칠고 게으른 생활에 버릇이 들어, 남의 경조사에 인사하는 것도 모두 그만두어 버리게 되었다. 어떤 때는 며칠씩 세수를 하지 않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열흘이 넘도록 망건을 쓰지 않기도 했다. 손님이 와도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나무장수나 참외 장수가 지나가면 불러서 앉혀놓고 그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에 대하여 친절을 다해 가르치기도 했다.
졸다가 남은 시간이 있으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졸아도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어서 어떤 때는 하루 종일을 푹 자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어쩌다가 글을 지어 나의 뜻을 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새로 배운 철현소금鐵絃小琴으로 두어 곡조를 뜯기도 한다. "
- 박희병 지음《연암을 읽는다》에서
어느 책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집안에 여러 나쁜 일이 겹쳐 일어나고 연암이 친구를 잃었기 때문에 낙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글만으로 이해한다면 다른 이유가 필요 없도록 무관심의 극치에서 늘어지게 한가한 여름나기이다.
누구처럼 멍! 때리는 게으름이 좋은 나는 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가만히 앉아 책읽기에 몰두한다. 그러나 열대야熱帶夜가 길어지면 함께 밤거리를 헤맬 막역지우莫逆之友를 찾아야 될 것인가, 그래서 연암 일행이 달빛을 밟으며 헤매던 그 길을 따라 걸어볼 것인가, 이 여름의 숙제이다. 柳
柳仁惠(류인혜)
* 1984년 수필 <우물>로『한국수필』봄호 추천완료.
수필집:『풀처럼 이슬처럼』,『움직이는 미술관』,『순환』,『나무이야기』.
시집:『은총』. 인문서: 류인혜의 책읽기『아름다운 책』.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펜문학상(수필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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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4-08-02 0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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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 읽게되는 단비같은 글입니다. 저도 요즘 시선이 영정조시대에 머물고 있어 더욱 부러워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당시는 바로 조선의 르레상스시대. 수석문화를 더듬에 오르다보면 그 넒은 지평위에 당시의 문화가 펼쳐집니다. 저는 직전 올린 글에서 연암과 아정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여기에서는 더 품성한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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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8-03 1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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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붙잡고 있는 지 참으로 오래 되었습니다.
이 일이 언제 끝이나나 기다렸는데 계속 새로운 이야기가 솟아납니다.
지혜로운 군주를 만난 때, 지식인들은 자신을 꿈을 펼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읽어 주시고 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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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4-08-02 1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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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류성룡님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 5대 명재상이었고,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써 전해지는데 이제는 자랑스런 국보 제132호로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와 함께 국민의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류재상의 후손답게 조선시대 풍류작가들의 면면을 재미있게 써, 삼복 복중에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지경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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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8-03 1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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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섭 선생님, 선생님께서 시원한 계곡 물에 발을 담그었다 하시니
저도 청량한 숲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 마음이 향기롭습니다.
수필의 선비의 글이라고들 할 때, 저는 평민의 글을 쓰고 싶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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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4-08-02 1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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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동안 예와 악을 강조하였던 공자의 주유천하가 떠오릅니다.
18세기는 조선의 개화기로 반상과 적서의 차별도 많이 완화되었기에 장유도 떠나 뜻이 합하는 벗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렇듯 '음악이 흐르는 수필의 세계'를 연출할 수 있었군요. 선생님의 전문적인 책읽기와 깊은 사색으로 탄생한 작품을 완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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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8-03 1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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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서얼의 지식인들을 등용하였지만 널리 파급되는 효과가 적었습니다.
정조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기용하여 많은 일을 도모하였습니다.
그 시대를 살면서 고민하며 뜻을 키우던 사람들에 대해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아집니다.
잘 읽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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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4-08-02 1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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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젊었을때 매일을 친구들과 어울리던 생각이 납니다. 대학때는 아르바이트같은것때문에 그런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고 2때는 정말 하루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궁금해서 못살았지요. 오늘은 또 어떤 즐거움이 있을까하는 마음, 여학생들과 단체로 미팅도 하고 딸기도 먹으러가고 밤새워가며 크리스마스미팅도 하고 만나기만해도 가슴이 울렁울렁 좋았던 그런 시간들, 하루는 이친구 집에서 자고 하루는 저친구집에서 자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여름에는 캠핑,무전여행, 기타도 치고 춤도 추고 대학에 들어서는 쎄시봉도 가고 학사주점에 가서 취해도 보고 할수 있는 일들은 거의 다하면서 하루하루가 그리 기쁠수가 없었던 같습니다. 잠시 좋은글 지그시 머물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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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8-03 1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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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선생님의 답글에서 열정을 다하는 여드름 꽃이 보입니다.^^
저는 배낭을 메고 산으로 다녔습니다. 명동의 설파, 종로의 르네상스 그리고 국립극장....
스케이트를 남대문 시장에서 사들고 여름에도 동대문실내스케이트장에 다녔답니다.
아, 지나간 옛날이여!!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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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4-08-02 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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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선생님, 지난번 지리산 모임 때 연암에 대한 말씀으로 많은 배움을 얻었는데 오늘 무게 있는 글을 또 읽으니 더 반갑습니다. 좋은 벗과 매임 없이 사귀는 것은 영혼을 살지우는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더운 여름밤을 시공을 초월하여 연암선생을 벗으로 맞으셨으니 더할 수 없이 좋은 삶이 아닌가 합니다. 더위에 건강도 챙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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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8-03 18: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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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주 선생님, 수십 년 연암과 사귀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쓴 여름을 주제로 한 글이 너무 부족하여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청탁이 와서 흥미를 가진 부분과 접목이 되니 이번에 그 한풀이를 했습니다.^^
더위에 지칠까 염려하는 마음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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