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내달렸다. 그날따라 배가 몹시 고팠다. 엄마 밥 줘하면서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우리 방에 낯선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는 리어카가 있었는데 옷가지와 솥단지 그리고 항아리 같은 것이 실려 있었고 낯선 사람들이 그 물건들을 우리 방 쪽으로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집이라고 해봐야 방 2개짜리 낡은 주택이었는데 안방은 부모님이 사용했고 건넌방은 형하고 나하고 둘이 사용했다. 그런데 우리 방에 남이 들어 온 것이다. 우리 집 형편도 어려워서 어머니가 건넌방을 세를 주신 것이었다. 졸지에 방을 뺏긴 우리 형제는 안방에 있는 다락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좁은 집에서 병희네 하고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었다. 병희는 나하고 같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이름은 윤병희였고 얼굴이 동그랗고 예쁘게 생긴 아이였는데 한동안 그 아이를 업신여기고 지냈던 기억이다. 하필 그 좁은 집으로 들어와서 우리 방을 빼앗은데 대한 불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병희 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집안 살림을 때려 부수고 그때마다 병희 엄마하고 남매가 우는 모습이 너무 시끄럽고 지겹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병희 엄마는 이사 온 후 우리 엄마가 하는 부업을 도왔다. 봉투를 붙이는 부업이었다. 풀을 쑤고 종이들을 펴놓고 붓으로 바르고 하는 작업이었는데 일 손이 부족해서 병희 엄마가 돕다가 언제부터인가 병희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같이 하였다. 그런 병희를 보고 봉투의 봉자를 붙여서 봉희라고 부르며 깔보고 놀려댔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돕는 가상한 아이였는데 그렇게 놀려댔으니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 같다.

 더욱이 병희 엄마가 우리 집 눈치를 보면서 연신 굽신거려서 그랬는지 병희는 나를 마치 주인집 도련님처럼 어려워하는 것 같았고 나또한 그런 관계를 자연스럽게 여긴 것 같았다. 병희가 한 두번 자기 이름이 봉희가 아니고 병희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으나, 내맘이다 하고 계속 봉희라고 불렀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별로 기분 나빠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보잘 것 없는 게딱지같은 집에서 거들먹대며 주인집 아들 행세를 한 것 같아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진다. 설마 병희도 나한테 잘못 보여서 쫒겨 나게 된다면 술주정뱅이 아빠하고 갈 데가 없어서 고분고분했던 것 아니었을까.

 이듬해 봄날에 엄마가 병희 엄마하고 인근 야산으로 꽃구경을 갔다. 나하고 병희도 같이 따라갔다. 엄마들은 샛노란 개나리와 화사한 벚꽃들에 연신 감탄하였다. 그러나 나는 산기슭에 널리 피어있던 들꽃들이 아름다워 정신을 빼앗겼다. 한 다발을 만들어 내려오는데 엄마가 흔한 들꽃을 뭐하러 가지고 오느냐고 하면서 버리라고 하였다. 나는 집에 가서 병에 꽃아 둘 것이라고 우겼으나 엄마는 집안만 어지럽힌다고 하면서 강제로 빼앗아 길가에 버리는 것이었다. 엄마가 밉고 분을 참지 못해 울었다. 엄마는 남자아이가 그깟 일로 운다고 핀잔을 주는 바람에 무안하고 무척 속이 상했다. 며칠동안 엄마한테 대한 섭섭함으로 말을 하지 않고 피했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서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병희가 서 있었다. 병희는 뒷짐을 쥐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들꽃으로 다발을 묶어서 들고 있었다. 엉겁결에 꽃다발을 받아들었더니 병희가 내 팔을 잡고 집 뒤에 굴뚝이 있는 곳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그 옆에 큰 꽃병도 놓여 있었다. 병희는 내손에 쥐고 있던 꽃을 그 꽃병에 꽂으며 빙그레 웃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얼굴이 빨개지며 가슴이 콩닥거리는 것이었다. 병희는 그 이후에도 꽃병에 있는 들꽃이 시들면 다시 꺾어다가 꽂아 놓았고 나도 집에 들어오면 집 뒤에 굴뚝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엄마에게 들키기도 했지만 병희가 그랬다고 했더니 왠일인지 이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병희에게 짖궂게 굴었던 일이 미안해져서 놀리는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렇게 들꽃을 함께 가꾸게 되면서 어린마음에도 병희와 묘한 감정이 싻트기 시작하였으나 병희네가 이사를 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얼마전에 우연히 병희 소식을 들었다. 부모덕은 없었어도 워낙 착하여 복 받고 잘 살줄 알았으나 남편 덕도 없어서 자식들하고 기흥 부근에서 조그만 음식점을 하면서 평생 가난을 벗지 못하고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소식을 전해준 사람도 우연히 아산 병원에서 갑상선 수술을 받고 퇴원하는 초로의 병희를 만났다고 한다. 동그랗고 예쁘장한 얼굴은 간데없고 바싹 마르고 얼굴에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는 것이다. 생각 있으면 한번 연락해보라고 병희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가슴이 두근 거리는 것으로 보아 한 구석에 병희를 보고 싶어 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첫사랑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화원을 하는 후배에게 부탁하여 연분홍색 금낭화와 보라색 붓꽃, 생강나무 그리고 마침 창포 꽃이 핀 것이 있다고 하여 들꽃만으로 푸짐하게 큰 다발을 묶었다. 병희의 쾌유를 빌며라고 리본에 글씨를 썼다. 그런데 아무래도 병중인 사람인데 병희라고 부르고 싶지가 않았다. 봉희의 쾌유를 빌며라고 고쳐썼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없어도 누가 보내는 줄 알 수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