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現狀

- 하찮으나 정말 소중한 -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입맛

귤 하나를 집어 든다. 차갑다. 귤은 차갑게 해서 먹을 때 더 맛이 난다. 껍질을 벗긴다. 꽤 두껍다. 수줍게 벗어 보이는 노오란 속살, 하얀 실옷을 걸친 게 더욱 유혹적이다. 조심스레 몸을 나눈다. 입안엔 벌써부터 침이 고인다. 그 야실한 몸의 한 부분을 입안에 넣는다. 입 안 가득 도는 단물, 신물, 그런데 신물이 더하다. 하필 이게 걸렸나.

딸아이가 입맛 없는 아빠 위해 사다 놓은 빵 상자를 연다. 또 노오란 색이다. 그 중 하나를 집어 든다. 한 입 베어 문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물컹, 감촉도 맛도 내 취향이 아니다. 치즈빵, 또 잘 못 골랐나?

아니다. 이건 어쩜 순전히 내 입맛 때문일지 모른다. 귤에게도, 치즈 빵에게도 잘못은 없다. 이만큼 세상을 살아왔으면서도 내 입맛을 모를 때가 많다. 맛있는 귤 하나, 입에 맞는 빵 하나도 고르지 못하는 내 눈썰미는 또 어떤가. 아직도 사는 법을 더 배워야 하나보다. 내 어설픔에 오늘도 입맛만 잡치고 만다. 입맛만.

꽃사과

아내가 어디선가 꽃 사과 두 개를 가져왔다. 세 번째 손가락 굵기의 한 마디쯤 크기 될 앙증맞은 열매, 참 예쁘고 귀엽다. 입에 넣으면 한 입가심거리, 맛을 보고 싶은 유혹도 잠시 차마 먹기가 아깝다.

왜 작은 것들은 아름다워 보일까. 그러나 사람은 키가 훌쩍 커야 멋있다고 하지 않던가. 한 편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두 주먹 크기로 튼실하고 먹음직한 사과에 비한다면 안쓰러울 만큼 작은 것, 종자가 그렇다 치더라도 생기다 만 것만 같아 가슴이 아리다.

지난여름, 시골에 심어놓은 몇 그루 나무에서 이 사과보다는 크지만 아기 주먹 정도의 사과들을 땄었다. 익을 때까지 까치들이 놔둘 것 같지도 않지만 사람이 곁에서 돌보며 키워낼 수가 없는 형편이라 아쉬운 마음 가득 미리 따냈었다. 그런데 제법 맛이 들어 사근거렸고 또 작고 예뻐 먹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가져다 딸아이도 주고 아내는 한두 개씩 누군가에게 선물도 한 것 같다. 생명을 미리 마감 했다고는 해도 제 몫들은 다 한 셈이다.

꽃사과는 품종이 이렇게 작게 열리는 것이라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마음 한 쪽이 짠하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해도 더 이상 자라지 못함은 슬픔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마저도 좋아라 한다. 손에 든 꽃사과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얼굴 가득 까닭모를 슬픔이 빠알갛게 베어나고 있다. 어느새 내 얼굴이 된다. 그건 내 부족한 어떤 면이 드러난 것이다. 꽃사과에.

물안개

아내가 물안개를 보고 싶다고 했다. 어려울 게 있느냐며 내일 새벽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새벽에 눈을 떠 밖을 내다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아내가 주저하는데 나가자고 했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희끄무레하게 강은 형체만 보이고 있었다. 하늘과 강과 길이 온통 회색빛이다. 물안개가 숨어버렸다. 오늘따라 물안개는 유난히 수줍음을 타는 것 같다. 강물 위로 눈을 주니 물안개는 비 내리는 새벽 어스름 속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숨어있다. 참 수줍음 많이 타는 물안개다.

추억의 올드 팝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비틀즈, 엘튼 존, 아바, 엘비스 프레슬리, 에릭 크립톤, 사이먼과 가펑클, 클리프 리차드, 죤 레논, 존 덴버 등 추억의 명곡들을 여덟 장 시디에 담아 단돈 만원이란다. 넥타이 정장에 큰 가방을 든 그가 펼쳐 보인 양 손엔 시디와 가사집, 다시 전철 안엔 비틀즈의 예스터데이가 가슴을 때린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시디는 어디로도 옮겨 갈 줄 모른다. 추억의 올드 팝은 그렇게 혼자 울고 있었다. 시디를 손에 든 그의 가슴에서도 잠들어 있던 추억들이 살아날까. 추억의 올드 팝 마냥.

조금만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이 뛴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전철을 타기 위해, 왜 조금만 더 일찍 나올 수 없었을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 조금을 못 한다. 너무 하찮게 여기는 탓인가. 그러나 세상은 그 조금 때문에 조금씩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하는 걸 모르나 보다. 조금은 그까짓 것이 아니라 가장 큰 것의 시작인 것인데. 사실 나도 오늘 그 조금을 못 당긴 채 이만큼 서두르고 있다. 조금만 일찍 나섰으면 될 텐데. 사람들은 그 ‘조금’에 너무 무심하다. 조금만 마음을 쓰면 되는데.

잠재의식

전철을 탔다. 맞은편에서 젊은이가 꾸벅꾸벅 졸다 이내 고개를 젖히고 잠이 든다. 그가 후다닥 일어나더니 닫히려는 전철 문 사이로 교묘히 바람처럼 빠져 나간다. 그는 내릴 곳에서 제대로 내린 것일까. 그러나 어디서 내려야지 하고 책을 보는 나는 꼭 한 정거장을 지나치고 만다. 잠재의식이 현실보다 강하다는 것일까. 사람들만 잃고 있는 자연적인 감각, 전철에서 내린 젊은이가 주저 없이 곧바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 내릴 곳에서 제대로 내린 것 같다. 참으로 신기하다. 동물성일까, 잠재의식일까.

우체국

다들 보내고 있다. 즐겁게 기쁘게 보내고 있다. 떠나보내는 것이 저토록 기쁘고 즐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답이 올 거라는 기대에서일까, 아니면 저걸 받고 기뻐할 누군가가 보여서일까.

나도 어디론가 저렇게 보내지면 기뻐 받을 이가 있을까. 나도 저렇게 기쁘게 보내질 수 있을까. 문득 아주 멀리 멀리 떠나야 할 순간이 그리 멀지 않았으리란 생각에 순간 몸이 움츠러든다. 나도 저들처럼 기쁘게 보내졌으면 싶다. 기뻐 받을 이가 있는 곳으로 보내지고 싶다.

우체국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오늘도 생명감에 넘친다. 보내는 마음, 보내는 사람들로 넘친다. 사랑을 보내고 마음을 보내고 기쁨을 보낸다. 우체국에는 그래서 슬픔은 없다. 기쁨과 희망만 있다.

아이가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편지를 부치던 아이 엄마가 그걸 받아 환하게 웃는다. 아이도 웃는다. 우체국에서.

창작산맥 2014. 봄호

최원현 www.essaykorea.net

《한국수필》에 수필 《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 사)한국수필가협회 감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등 13권.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 고등학교 교과서 《문학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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