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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류인혜 |
날짜 : 14-01-23 08:44
조회 : 2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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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선물
류인혜
인천연안부두에서 아침을 먹고 배에 올랐다. 8월에 예정되었던 백령도 행이 태풍으로 연기되었다가 이제 실현이 되는 것이다. 십년 전에도 방문을 계획했다가 무산 된 적이 있어 마음에서는 참 먼 곳이다.
백령도는 북한 땅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고,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가장 먼저 들어온 역사의 현장이다. 사곶해변은 모래가 단단히 굳어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되었으며, 자동차가 그 모래 위로 다닌다. 또 밟으면 자글자글 예쁜 소리를 내는 몽돌이 지천으로 깔린 해안이 생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런 호기심으로 여행하는 곳이 아니라 비장한 마음가짐이 없이는 만나기 어려운 곳이다. 그 옆 동네인 연평도 포격사건의 충격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두려운 마음도 든다.
모든 복잡함을 무시하고 백령도가 그곳에 있기에 찾아 간다. 사전답사를 했다는 분이 재미있는 말솜씨로 멀미약 먹기를 강조한다. 생각으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듯했지만 혹시나 물약 한 병을 받아 챙겼다. 안전만 생각했지 멀미에 대해서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매일 방영되는 일기예보에서 서해안의 파고가 어떻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될 듯해서 승객들에게 휴지를 챙겨주는 승무원에게 파도의 높이를 물었더니 2~4m라고 한다. 보통 배는 운행되지 못하지만 우리가 타고 가는 배는 678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큰 배라서 그 정도의 파고에는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
백령도는 해병대가 주둔하는 곳이라서 손님 중에는 중간 부분의 머리카락을 세우고 양쪽 옆을 깎아 올린 해병대 스타일의 군인들이 많았다. 좌석을 찾아 앉아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배는 흔들흔들 앞으로 나간다. 저 멀리에 그림처럼 서 있던 인천대교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가 지나갔다. 안내방송에서 이제는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나왔다.
한 시간쯤 지났는가, 선내가 술렁거린다. 앉은 자리가 앞쪽이라서 배가 파도와 싸우며 나가는 대로 반응이 바로 온다. 높이 치솟아 올라갔다 좌우로 흔들리며 내려오는 기세가 수상하다. 아무래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 해야겠기에 멀미약을 마셨다. 뒤에 앉아서 쿨럭이던 김 선생이 어느 틈엔가 사라졌고, 그 옆의 여자 분도 힘들다며 기어서 앞으로 나가 누웠다. 내려간 김 선생이 소식이 없어 아래층 화장실로 가보려고 했지만 선체가 심하게 요동하는 터라 움직일 수 없다.
이곳저곳에서 속이 뒤집히는 소리가 처절하다. 귀신 잡는 해병대 용사들마저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나타나는 뚜렷한 증세가 없는 사람들도 찌푸린 얼굴로 고통을 참고 있다. 내 양쪽 옆 자리의 사람도 나누어준 비닐봉지를 입에 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린다. 어찌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각자 따로 앉아서 고통을 견디고 있지만 일행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배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겨 같이 흔들거리며 처분을 기다렸다. 무섭게 뒤틀리는 내장에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며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 속이 부글거리며 목 언저리까지 올라오던 매슥거림이 잠간사이에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를 되풀이 한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기다렸다. 더 심한 고통 중에 있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한 고통이 얼마나 많았던가. 머리가 멍해지도록 뒤흔들던 혼란이 있었고,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있었고, 잊으려고 몸부림쳐도 가시지 않던 상처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지나갔다. 묵묵히 견디고 있으면 시간의 힘에 의해 지나가 버리지 않았던가. 이런 일시적이고 물리적인 멀미는 아무것도 아니다. 백령도에 도착하면 씻은 듯 사라질 것이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괴로워하는 자신에게 힘을 주었다. 그런데 승무원이 지나가며 이제 배가 소청도를 향해 방향을 바꾸면 더 많이 흔들린다고 경고를 했다. 모르겠다, 포기할 때가 왔나 보았다. 그러나 모진 애를 쓰면서 견디어 낸 시간을 어이없이 허물기는 싫다.
다행스럽게도 소청도에 도착한 배는 염려와는 달리 많이 진정이 되었다. 다시 한 번 더 대청도에 머물러 승객이 내릴 동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이제 10분만 더 참고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흡사 해산할 때의 진통처럼 주기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났다. 드디어 네시간 남짓의 운행시간이 스무시간보다 길도록 멀고멀었던 백령도에 도착했다.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탈출하듯 하선하는데 찬바람이 몰아쳐 온다. 땅으로 내려서자 초면인 백령도는 신선한 바람으로 맞이한다. 그 바람은 신기하게도 배 멀미를 전부 가져가 버렸다. 뒤돌아보니 그렇게 요동을 치던 배가 모른 척 시침을 떼고 우뚝 서 있다. [문화강남] 2013년 제15호
柳仁惠(류인혜)
* 1984년 수필 <우물>로『한국수필』추천완료. 수필집:『풀처럼 이슬처럼』,『움직이는 미술관』,『순환』,『나무이야기』. 시집:『은총』. 인문서: 류인혜의 책읽기『아름다운 책』. 명성교회 30년사(2권 편년사) 집필.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펜문학상(수필부문) 수상.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한국수필』자문위원. 국제펜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죽순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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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1-23 0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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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는 2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이제 보낸 원고가 실린 마지막 책이 왔습니다.등단 30년 동안 가장 많은 작품을 쓴 해인 듯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든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이든 쉬지 않고 열심히 쓸 수 있는 환경을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또 어떤 글을 쓰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부족하지만 읽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소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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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4-01-23 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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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혜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의 열정과 도전은 늘 아름답습니다. 백령도 탐방을 통하여 또 하나의 기쁨과 '시간의 선물'을 받으셨군요. 저도 15년 전 주의보가 내려 거문도에서 여수까지 추석 전날 114km 거리를 일엽편주나 다름없는 私船를 타고 生死의 기로에서 살아 나온 경험이 있어,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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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1-24 0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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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섭 선생님, 바닷가에 사시는 분들은 거센 파도를 자주 보겠지만 바닷물이 치솟는 광경은 처음 겪는 일이라서 눈앞이 캄캄했었답니다. '일엽편주', '생사의 기로'라는 단어가 새삼스레 다가옵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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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4-01-23 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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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남성과 달리 주로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다고 하셨던 말씀 생각납니다.
해군도 아니고 더군다나 여성이 배를 탈 기회가 그리 많지가 않지요. 그것도 파도가 드센
물결에 춤추는 배에 갇혀 산고와 같은 고통을 생생하게 체험하셨군요. 무엇이든지 체험에서
나오는 글은 상상하는것 하고는 확연히 느낌이 다르네요~류인혜선생님 항상 공부하시는
모습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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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1-24 0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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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생님의 수필에 대한 각별하신 관심은 옆에서 보는 사람도 대단한 즐거움입니다. 독특한 경험에서 나오는 인생의 특별함이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어요. 저도 색다른 경험을 위해서 밖으로 나다니려고 하지만 이제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하루 서성이면 다음날에는 쉽게 말해서 뻗어버립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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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4-01-24 0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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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지난 여름 휴가때 변산반도에 여행 갔을때 배를 타고 흔들려 보았습니다. 아내는 멀미까지 하고요. 그래도 저는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배위에서 사진도 찍고 그랬었지요 자칫하면 뒤짚여서 바다의 재물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도요. 감사합니다. 류인혜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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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1-24 0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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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의 좋은 여행을 즐기는 선생님이 가끔 부럽습니다. 이제는 배를 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렇지만 나이든 사람들의 희망은 온갖 시설을 갖춘 거대한 배를 타고 세계일주라니 시간이 더 지나면 생각이 바뀌겠지요.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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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4-01-25 0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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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백령도엘 다녀오셨군요. 멀미를 한 대목을 읽으니 저도 거문도 다니면서 멀미로 고생했던 생각이 스침니다. 40년전 거문도는 여수에서 삼산호와 신라호가 번갈이 다녔습니다. 뱃길을 일곱시간이 걸렸지요. 초도와 거문도 사이는 파도가 높기로 유명한데 사람들의 절반이상이 멀미로 실신을 하곤 했지요. 선실에는 토를 할때 쓰라고 깡통들이 비치되어 있곤 했습니다. 많은 작품을 발표하셨는데 갑오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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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1-25 1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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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선생님, 거문도가 아름다운 섬이라고 들었습니다. 뱃길을 어렵게 가서 좋은 풍경을 보면 멀미를 깨끗이 잊을 듯합니다. 요즘은 좋은 배가 다녀서 백령도 가는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어요. 올해는 걸쳐있는 원고를 정리하여 출간에 정신을 쏟으려면 기운을 차려야 합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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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4-01-25 2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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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쓰나미나 북풍한설도 그렇게 참아내면
새롭고 신비로운 날들이 펼쳐지는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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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1-27 0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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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속에 나그네길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넣으려고 하다가 멀미에만 집중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맞서서 견디느냐에서 잘 살고 못 살게되는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일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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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4-01-27 1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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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는 다시 한 번 가고 싶지만 배삯이 너무 비싸서 차일피하여 왔습니다. 앞으로 글이 더 기다려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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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1-28 1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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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선생님, 백령도까지는 안보교육으로 참여했기에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 기회를 잘 잡은 듯 합니다. 작가회에서 단체로 갈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리고 <연재에세이> 쪽에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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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4-02-01 1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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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혜 선생님, 삶의 행로가 배의 항로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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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4-02-01 1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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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라기보다 주말의 의미로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의 하루가 소중한 날이 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길에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뜻을 읽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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