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꽃

박 원명화

  하늘도 심기가 불편한 듯 아침부터 잔뜩 찌푸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날씨 변화에 따라 빈번히 나타나는 오십견(五十肩), 어깨가 아프니 움직이기도 싫어 청소를 미루었더니 집안까지 우중충한 느낌이다. 따뜻한 돌침대 위에 편안히 누워 신문을 뒤적이다 깜박 잠이 들었다. 그 한잠이 약이 되었는지 몸을 짓누르던 한기가 완전히 가신 듯 마음이 밝아지고 기분도 상쾌하다.

창문 너머로 뜻밖에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다. 오랜만에 풍기는 겨울 냄새, 겨울이 주는 반가운 선물을 받은 듯 반갑다. 이렇게만 종일 내린다면 온 천지가 금방 흰 눈에 묻혀 버릴 당당한 기세다. 겨울은 역시 눈이 와야 제 맛이 나는 것 같다.

오랜만에 한가롭게 차를 마신다. 향기와 빛깔의 싱그러움을 음미하면서,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새하얀 흰옷을 입고 나풀나풀 허공을 떠도는 모습이 마치 천진스런 아이의 춤사위처럼 보인다. 눈송이가 점점 소담해지면서 내리는 춤사위도 빨라진다. 그 눈꽃 속으로 눅눅한 나의 외로움이 빨려든다.

때맞추어 라디오에서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노래가 흘러나온다.

♩♩♬ 이제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커피 한잔과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음악을 감상하고 있자니 마음속에 히터가 켜진 것처럼 온 몸이 따뜻해진다. 아~이런 분위기에 젖어 본 게 얼마만 이련가. 일에 바빠 동동거리며 뛰어 다녔던 게 마치 아득한 먼 옛날일 같다.

안밖이 화답하는 감미로운 선율, 정말 제 맛이 난다. 가끔은 이런 분위기에 젖기를 소망하지만 막상 나갈라치면 길이 막히고 지저분하다고 투덜대다 결국엔 현실에 안주하곤 한다. 그렇다 한들 저토록 곱게 내리는 눈을 어찌 미워할 수 있으랴. 지금 이 순간은 원망도 미움도 다 감싸 안을 것만 같다. 하얀 눈앞에서는 누구나 이렇듯 착한 마음의 등불이 밝혀지기 마련인가 보다.

아파트 주차장은 벌써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웃고 떠들고 눈을 뭉쳐 던지고 시끌벅적하다. 나도 끼어들어 끝 간 데 없이 장난치며 놀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나 그것은 회억일 뿐,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데 몸은 이미 겁쟁이가 된지 오래다.

따스한 커피 잔을 손에 들고 음악을 듣고 있는 지금의 이 분위기가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여유와는 상관없이 오늘도 아침 일찍 나간 남편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이 행복에 만족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저 가깝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그에게 짜증을 부리기 일쑤다. 마음으로는 작은 것에도 행복해야지 하면서 가슴으로는 언제나 더 큰 것을 바라는 욕망은 거의 질병수준에 가깝다. 불처럼 활활 타올랐다가 이내 꺼져 버릴 모래 위에 욕망에서 내 영혼은 언제쯤이나 벗어날 수 있을까.

종일 일에 시달려 쓰러질 듯 피로에 겹쳐 살던 때가 언제이던가. 이젠 그랬던 기억조차 희미하다. 망각이 약이라 했다. 겨울의 하얀 눈을 만나면 여름의 궂은비를 생각하지 못하는 게 사람의 마음. 눅눅했던 장마철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잊고 살게 마련인가 보다. 나 또한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차를 즐기면서 고단했던 옛 여정을 잊고 있지 않은가. ‘눈 내리는 게 참 좋구나’ 하면서.

혜안은 결코 나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닌 성 싶다. 내가 행복하면 세상이 다 행복해 보이고 내가 불행하면 세상이 다 불행해 보인다. 연륜만큼 부질없는 관념을 던져보지 못한 체 마음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무엇이든 나 자신의 잣대로만 재려들려는 성정. 눈이 덮였을 때는 어두운 뒷골목이나 양지바른 비탈길이나, 촉촉하고 아름다운 건 똑같다. 그러나 눈이 녹아 없어질 땐 모두가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다정했던 수다들이 눈 위로 하얗게 쌓인다. 한 해가 시작된 게 억그제 같은데 벌써 덩그마니 달력 한 장이 외롭다. 아무리 아쉽고 허전해도 이내 떠나갈 한해가 아닌가. 하지만 나는 아직도 새해를 맞이할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알뜰히 채우지 못한 게으름이 발목을 잡고 있기에.

겨울만큼이나 나라 안팎의 경제사정도 춥고 삭막하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추위가 아니라 조여드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큰 것 같다. 제각기 겪어야 하는 어렵고 힘든 경제 사연들을 저 깊은 눈 속에 묻어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모두가 어려운 경제난에 웅크리고 있는 요즘, 용수철처럼 일어나 당당하고 꼿꼿하게 내 자신을 숙성할 시간을 가져와야 하겠다. 그리고 1년 후 내가 얼마나 커 있을 지가 궁금해진다.

땅 속 깊은 곳에서는 벌써부터 봄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가운 흰 눈을 땅으로 남김없이 내려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추운겨울의 가장 자리에서부터 봄은 살금살금 간지럼을 태우듯 더디게 오리라. 봄을 향한 첫발을 내디딜 때쯤엔 모두가 꿈꾸는 희망이 현실로 이어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새해에는 나라 전체가 신명난 축가를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외롭고 삭막한 이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적셔주는 겨울 꽃의 신비가 오늘따라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