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모자의 창을 약간 구부리는 것이 내가 부릴 수 있는 멋의 전부였다. 일요일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여학생들과 어울려 수원에 있는 딸기밭으로 놀러가는 날이었다. 공연히 흥분이 되어 밤잠을 설치고 나왔다. 여고생의 풋풋한 향기를 가까이서 맡을 수 있는 행복한 날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흥분은 젊음의 혈기와 비례하는 것 같다. 한창 싱싱한 딸기를 따서 먹는 맛도 기가 막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여학생과 옆에 앉아서 함께 기차 여행을 한다니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단체로 미팅을 하는 것이니 개인적으로 사귀는 것은 불문율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 내 옆에 앉게 될까? 별명을 크리스티나라고 부르는 청순하게 생긴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애가 옆에 앉는 행운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야기 내용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정, 궁하면 짧은 지식이지만 베르테르나 보들레르 아니면 고독의 시인 릴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호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남학생 6명에 여학생 5명이 나왔다.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크리스티나도 나왔다. 단정하면서도 정갈한 모습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막상 기차에 오르자 여학생들은 짝을 이루어 앉는 게 촌스럽다고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편하게 간다고 하여 짝 맺는 것은 무위로 돌아갔다. 묵지빠 놀이도 하고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면서 딸기밭으로 갔다. 봄바람과 함께 초원의 싱그러움이 딸기밭을 온통 감싸고 있었다. 지금처럼 비닐하우스 같았으면 무슨 낭만이 있었겠는가. 그런 걸로 봐서는 예전의 우리가 지금 사는 젊은 사람들보다는 행복했던 것 같다. 여학생들이 손수 준비해온 점심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 기분은 마치 신혼 생활을 하는 즐거움 같았다.

딸기밭은 2 - 3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이리 저리 몰려다니기도 하고 혼자 예쁜 딸기를 고르려고 찾아다니기도 하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얼핏 윗 밭을 쳐다보니 크리스티나가 혼자 딸기밭을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크리스티나 쪽으로 걸어갔다.

딸기 많이 땄니?

응.

맛있지?

응.

친구들이 없을 때 무슨 말을 하여 빨리 호감을 주고 좋은 인상을 심어 놓아야 하는데 더 이상 말문이 막혔다. 문득 얼마 전 읽은 스토르베리 시즌 (딸기의 계절)이라는 스토리가 생각났다. 딸기치기 장난말이다.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처녀의 열린 앞가슴에 딸기를 밀어 넣은 다음 친구들끼리 가슴을 살짝 쳐서 딸기가 가슴에 으깨져 하얀 블라우스를 선홍빛으로 물들게 하는 장난이다. 안절부절 못하고 얼굴이 빨개진 처녀에게 남자 아이가 다가가서 이를 꺼내주면서 풋사랑을 느껴 간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나는 무릎을 구부리고 딸기를 고르는 크리스티나의 옆에 섰다. 살짝 쳐다보니 앞가슴 부분으로 블라우스가 약간 열려 있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잘 익은 딸기를 하나 골라 크리스티나의 블라우스에 떨어뜨렸다. 이제 우리들의 낭만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크리스티나도 스토르베리 시즌 책을 읽었겠지. 그렇다면 내 장난을 재미있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크리스티나는 가슴에 이물질이 들어가자 깜짝 놀랐다. 순간 자기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는 바람에 딸기가 뭉그러져 버렸는지 금방 하얀 블라우스 밖으로 딸기물이 베어 나왔다. 크리스티나는 어쩔 줄 몰라서 무척 당황해 했다.

소설대로라면 내가 다가서서 이것을 꺼내주면서 비로소 우리들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가슴을 감싸 안은 크리스티나의 팔을 잡으려고 하자,

“아냐, 가까이 오지 마 !”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일어나더니 뒤도 안돌아 보고 달려간다. 다행히 친구 중에 소울을 가져온 학생이 있어서 크리스티나는 빨갛게 물든 가슴을 가리고 서울로 돌아 올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금방 그 일을 잊어 먹고 떠들어대며 시끄러웠으나 크리스티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다.

‘사과를 해야 할까, 아니야 어쨌든 내가 저를 좋아 한다는 표현을 하면서 멋진 추억 거리를 만들었으니 나중에는 나를 기억하고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있을 거야’ 하며 자위하고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며칠 후 동선이가 여학생 중에 혜숙이라는 학생을 만났다고 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 얘기도 나왔단다. 크리스티나가 잔뜩 골이 나서 살은 돼지처럼 뛰룩뛰룩 찐 게 칠칠맞게 딸기장난은 쳐가지고 옷도 다 버리고 속상해서 죽을 뻔했다는 것이다. 어설픈 선머슴아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다. 스토르베리 시즌이고 크리스티나고 다 날라 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