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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박영보 |
날짜 : 14-08-16 02:09
조회 :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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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탕
박 영 보
재탕 나는 커피를 즐기는 편이 아니다. 누구와의 만남 같은 데서 함께 마셔야 할 경우에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경우에나 한잔쯤 마시는 것이 고작이다. 나 혼자 살고 있는 집이라면 아예 이 집안에는 커피라는 것이 없어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매일 아침 한잔씩의 커피는 필수이다. 나보다는 진하게 마시는 편이다. 첫 번째로 걸러낸 진국은 물론 아내의 몫이다. 그 다음은 내 차례, 한잔의 물을 더 부어 끓여낸 재탕은 자연 내 몫이 된다.
나에게는 적당한 농도이다. 어떤 때는 세 번째 잔의 물을 다시 부어 걸러 낸 삼 탕째 커피 물도 내게는 여전 알맞은 농도의 커피가 된다. ‘재탕’이라는 말 말고도 ‘재활용’이라는 말을 여기에 붙여도 될지 모르겠다. 한잔 분량의 커피가루로 두 잔이나 세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 꽤나 경제적이지 않는가. 본전의 두 배나 세 배의 효용가치가 있으며 여기에 자기 기호에 맞춘 농도의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 해볼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싱거워서 무슨 맛으로 그런 걸 마시느냐”라거나 “그럴 바에야 아예 맹물이나 마실 것이지”라고도 한다. 그러나 각자의 기호는 다르지 않는가. 쓰디쓴 탕약과 같은 스타벅스 커피에 길들여진 입맛이 있는가 하면 여기에 두 배나 세배의 맹물을 섞어 마셔도 써서 못 마시는 사람도 있다. 나에게 있어서 재탕째 커피는 커피 맛을 즐기기에 가장 적당한 농도이고 삼 탕째에서도 아직도 남아 있는 커피 향이 구수하게 느껴진다.
즐긴다고 까지야 할 수 있을까마는 삼 탕째의 경우도 차거나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맹물보다야 낳다. 보리차나 옥수수 차 또는 숭늉 대신으로 마시기에 적격이기도 하다. 각자가 자기 취향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 누가 이를 탓하랴. 요즈음에 들어 나의 취향이 좀 달라진 것 같다. 격이 상승되었다고나 할까.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마시는 커피 때문이었으리라. 향도 신선하고 스타벅스처럼 독하지도 않아서 좋다. 한자리에서 두 잔은 기본이다. 50~60센트면 무한정 리필이 가능한 맥도날드의 시니어 커피도 단골메뉴가 되었다.
본래부터도 커피에 설탕은 넣지 않고 크림만 약간씩 넣어 마셨지만 교회나 맥도날드에서의 커피농도는 블랙으로 마시는 편이 커피의 향을 즐기기에 더 좋은 것 같다. 가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냥 덤덤하게 살아온 것 같은 내 삶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특성이나 특징도 없고 어떤 분야에 내세울만한 어떤 전문성도 없는 그야말로 맛대가리 하나 없는 인생이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맛의 커피 물을 마시고 있을라치면 나 자신의 됨됨이를 바라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치 나의 진면목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서일 게다. 화끈하지도 깔끔하지도 않게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하는 수 없이 꼼지락거리며 살아온 것 같은 삶의 스타일. 해볼만한 일이다 싶어 무언가를 저질러 보려다가도 주변에서의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망설이기가 일수였다. 그러다가 주변에서의 어떤 부추김이라도 있으면 별 생각도 없이 막무가내로 휘말려 들기도 해온 것이 나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주변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을 만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며 일구어 보려는 의지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자잘한 일이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구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큰 일로 나 같은 사람을 불러주는 사람은 없지만 자잘한 문제가 생길 때면 분수도 모르고 나서서 나의 손끝으로나 머리 굴림으로 또는 작은 힘으로나마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변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니 나 같은 존재라도 그냥 놔두기에는 거추장스러울지라도 그냥 버리기에는 좀 뭣한 존재라도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입장이 아니겠는가. 까짓 재탕이면 어떻고 재활용품이라면 어떠랴. 주전 멤버는 되지 못하더라도 마이너리그의 벤치 워머면 어떠랴. 이것도 저것도 아니더라도 어쩌다 필요 시에 불려지는 땜 빵 자리면 어떠랴. 이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려는 나의 안간힘은 그 나마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재탕 커피 한잔. 경우나 상황에 따라서 이 재탕의 커피 한잔은 소위 말하는 진국보다도 더더욱 필요로 하는 농도의 마실 거리가 될 수가 있다는 데에는 다소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의 미적지근하고 끈적거리는 삶의 방식일지언정 어디엔가 필요로 하는 구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해 본다. 꼭 알짜배기 진국이 아니더라도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정도의 역할, 재탕이면 어떻고 삼 탕이면 어떠랴. 재탕. 첫 잔은 아내 몫. 둘째와 삼 탕째는 내 몫. 이렇게 걸러낸 다음의 찌꺼기는 뒷마당으로 간다. 이 찌꺼기들을 모아 썩혀 두면 화분이나 야채 밭에 쓸 수 있는 아주 기름진 양질의 거름이 된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재활용의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 이다.
나에게도 작으나마 그런 정도의 활용 가치라도 있을까. 그나마의 용도도 없게 될 때 처치를 하는데도 꽤나 많은 골치를 쓰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면 아무런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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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4-08-16 0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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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탕이라고 해서 지난 글을 다시 올린건가보다 하고 읽었는데 커피 말씀이네요. 진해서 드리는것이라기 보다는 아내를 위하는 마음이 먼저라서 드리는 것이겠지요~ㅎㅎ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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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14-08-16 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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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신이 작으나마 재탕으로서의 활용가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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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4-08-16 0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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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제목만 보았을때는 무슨 재탕인가 했습니다.
대단한 커피 애호가인것 같습니다.
글속에서 사모님 사랑이 남다른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커피를 즐기시며 노후를 아름답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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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14-08-16 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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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재탕 커피 괜찮더군요.
그런데 요즈음 커피 전문점이라는 곳이 많아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마시는 커피는 어딜 가봐도 똑같은 맛, 종류, 컵의 크기와 분량이 하나같이 똑 같네요. 그런데 이제 저에게도 그 맛이 익숙해져가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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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4-08-16 0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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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재탕이라면 녹차와 같이 종이 봉투에 들어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커피도 재탕 삼탕으로 먹을 수 있군요! 늘 커피는 가루와 프림 설탕을 혼합한 경험 밖에 없었는데 재탕 삼탕 그 이상도 우려 먹을 수 있다니 이제 알았습니다.
박영보선생님의 인내심과 자제력 그리고 배려하는 마음은 수양이 잘 되신 선생님으로 느껴집니다.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이 잘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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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14-08-16 0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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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제가 삶을 살아오면서 이런 말씀을 들을 때도 있나 싶어 흥분되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그런 말을 들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거든요. 집에 돌아가면 아내에게 이 말씀 꼭 전하며 자랑도 하겠습니다. 볶은 알커피를 수동 그라인더에 갈아 휠터에 받혀 끓는 물을 부어 울궈낸 진국은 마님께 바치고 재탕 삼탕은 제 몫이 되는 셈이지요. 어떤때는 사탕 오탕을 해도 그냥 맹물마시는 것보다 좋기도 하지만 그정도까지 가자면 귀찮아지기도 해서 그냥~,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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