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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진화 |
날짜 : 11-10-16 01:39
조회 :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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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쓰는 편지
이진화
비가 걷힌 하늘에 달빛이 맑다. 추석을 이십일 앞두고 여위어가는 하현달이다. 중요한 편지를 써야 하는데 말머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운명, 신화, 언약과 같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오래된 장면들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종종 결혼식에서 축하편지를 낭독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일가친척이나 절친한 친구의 경우에 받아들이는 일이지만 결혼축하 편지는 일반적인 원고와는 다른 부담감이 있다. 신랑신부가 평생을 통해 가장 행복하고 기대에 차있는 날 조언이나 충고를 할 수도 없고 주례사와 유사해서도 안 된다. 그동안의 축하편지는 오랜 세월 신랑이나 신부의 부모와 그 윗대로부터 관통해 내려오는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지를 확인하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축하해주곤 했다. 결혼이란 두 집안의 역사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디자인하여 이야기를 바꿔 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올가을에는 절친한 친구의 딸 모나(별명)의 결혼축하연에서 편지를 낭독하기로 했다. 나의 친구 올리브(별명)는 같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고 신혼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함께 보냈다. 만리타국에서 만난 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는 각별한 우정과 수많은 추억을 나누었다. 올리브의 남편은 사교적이고 유쾌한 사람이라 항상 새롭고 흥미로운 만남이 이어졌다. 나일강의 노을과 알렉산드리아의 해변을 보며 향수를 달래고 카이로 시내의 맛집을 찾아다니던 날들이 떠오른다. 사막에 부는 시원한 밤바람, 전통적인 시장의 향료와 숯불 냄새, 이집트인들의 독특한 노래와 타악기 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올리브 부부는 특별한 사랑을 나눈 사람들이다. 이탈리아, 터키, 이집트를 거쳐 포르투갈로 발령을 받은 그들 부부의 자유롭고 여유 있는 생활은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모나는 그렇게 행복의 절정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런데 운명이 어떻게 그렇게 쉽사리 변덕을 부리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딸이 태어나자마자 모나의 아빠는 세상을 떠났고, 충격적인 그 사건으로 인해 내게는 생사화복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랑을 운명이라고 굳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면 사랑하고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낭만적인 신화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대한 신화는 워낙 깊고 질겨서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 확신에 찬 믿음 때문에 눈앞의 대상에 대해 먼 시선을 두기도 하고 놓친 인연에 연연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기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남녀가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랑을 기다리다 무덤덤하게 살아가기도 하고, 늪에 빠져 조난을 당하거나 서로 옷자락을 움켜잡다 마침내 누더기가 된 인연을 가차 없이 벗어던지기도 한다.
현실은 각박하고 누추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공이 아닌 단역으로 살아가기에 동화처럼 끝나는 이야기는 드물기만 한데, 매스컴과 드라마는 현대판 동화를 끊임없이 배포하고 있다. 다른 나라 왕족과 재벌의 사랑 이야기에 한숨짓고 흥분하며 우리의 운명적 사랑도 가상의 현실 속에서 연장 상영 중이다.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드라마보다 예술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고 자주 보게 되는 이유는 운명에 맞서는 인생을 보며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다.
동화 같은 사랑은 드라마의 종영과 함께 끝나게 되고, 설사 운명으로 시작된 사랑이라 해도 사랑의 수고와 변화의 습관이 없이는 자라날 수가 없다. 사려 깊은 말 한 마디와 귀 기울이는 습관, 따듯한 밥 한 그릇을 준비하는 노력이 오히려 우리의 사랑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 운명을 거슬러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이 삶의 터닝 포인트를 끌어당기는 일이라는 것을 결혼생활 삼십 년이나 지나서야 깨닫는 중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주역으로 새로운 드라마를 써야 하는 신부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미국 이민사회에서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한 이민아 변호사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오 년 간의 생활고에 지쳤고 결국 남편과 헤어졌다. 그 때 나는 결혼이 언약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사랑이 언약이라는 말은 아마도 환경과 조건이 바뀔지라도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의사이며 법학자인 김미경 교수는 ‘부부의 사랑은 파트너십’이라고 정의하며‘파트너의 관계는 최상의 믿음, 신뢰의 관계이며 심지어 파트너십이 해제된 다음에도 지속되는 것이 파트너 관계’라고 판례를 들어가며 말했다. 부부인 안철수 교수와 김미경 교수는 든든한 파트너십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두 여성의 말에 깊이 공감이 가는 이유는 연애지상주의가 결코 결혼을 완성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과 결혼의 선배라고 해서 선뜻 롤모델로 나설 수 없는 것은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끝없는 질문만 있는 까닭이다. 바라기는 미술을 하는 모나와 음악을 하는 모나의 신랑이 오노 요코와 존 레논처럼 서로에게 온전한 선물이 되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공유하고 나누었으면 한다. 다행스럽게도 모나는 태중에서부터 아빠, 엄마의 사랑 뿐 아니라 누대의 큰 사랑을 받아보았기에 엄마가 누렸던 행복을 회복하고 그 사랑을 성숙하게 키워 가리라 믿는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아름다운 나무를 보면 아이들을 닮았다. 올리브와 추억을 쌓은 카이로를 떠나 출애굽한 지 삼십 년이 되었고 망고나무 태몽을 꾸고 태어난 우리 아들 익이도 내년 봄에는 짝을 만나 결혼을 한다고 하니 망고나무처럼 향기롭고 풍성한 열매 가득 맺기를 기도하고 있다. 가을의 신부가 되는 모나는 나일강가에 그늘을 드리우던 부겐베리아 처럼 색색의 다채로운 꽃을 피우기를 바라며 이제 결혼축하 편지를 써야겠다. 창밖의 달이 조금 더 높아지고 밝아졌다. 모나는 이집트식 여자의 이름으로 달을 의미한다
(한국산문 10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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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1-10-16 0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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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본능적이지만, 사랑이 영원하지 않은 것 또한 본능입니다. 그 본능을 뛰어넘어려변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지요. 그중 제일은 인내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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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1-10-16 1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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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순 선생님,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좋은 글이라고 평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비 그친 후의 하늘이 몹시도 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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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1-10-16 2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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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러 선생님 글에 푹 빠져봅니다.
인생의 사랑, 믿음, 인내, 낭만, 이별! 인생의 희노래락을 몽땅
맛보게 하는 글이군요.
저도 '이민아 변호사의 저서 '땅끝의 아이들'을 인터넷으로 주문한 상태입니다.
모나의 결혼식장에서 낭독하실 글이 궁금하군요.ㅎ
이슬처럼 영롱한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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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1-10-18 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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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희 선생님, 그렇게 비가 많던 여름이 거짓말처럼 가버리고 완연한 가을 날씨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사계절도 그와 같겠지요. 늘 의미있는 삶을 위해 봉사하고 몰두하는 선생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결혼식에서 낭독하고 여러분들에게 인사를 받았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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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0-17 0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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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로 월요일의 아침을 엽니다. 아마도 이 글로하여 한 주일이 내내 풋풋해질 것 같습니다. 이진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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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1-10-18 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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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문 선생님, 하루하루가 보석 같은 날들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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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1-10-18 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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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끝없는 관심과 이해와 용서,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는 일 등등, 그런것들이 아닐까 순간 생각해봅니다. 내년 봄에 짝을 만나 결혼 하게되는 아드님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상념이 많으시겠습니다.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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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1-10-18 1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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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택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이가 날을 받아놓으니 여러가지 생각이 오고가네요, 추워지는 날씨에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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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1-11-15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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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화 선생님 ! 결혼식은 항상 평생 준비해서 한시간내에 해치우는 통과 의례로 생각했는데, 더욱 더 뜻깊은 결혼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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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1-11-23 0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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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다녀온 여행지의 말만 들어도 옛날을 찾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많은 즐거운 생각과 접할 때가 다른 분들보다 많습니다. 이집트의 이야기가 그렇군요. 해외를 넘나드는 위 글이 퍽 참신하네요. 또 다른 여행을 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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