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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1-08-22 09:09
조회 : 2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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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
상처 입은 작은 새 같은 여자아이가 생각난다. 흐린 날에도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던 아이. 얼굴 윤곽은 희미하지만 꼬리가 치켜 올라갔고 흰자위가 맑아 푸르스름하던 빛이 감돌던 큰 눈이 가슴에 서늘하게 남아 있다. 그 아이의 눈을 떠올리면 귓가에 날벌레가 잉잉 날갯짓을 하고 얼굴이 따가우며 가슴이 먹먹해온다. 그 아이는 내게 어려운 숙제를 남겨주었다. 알려지고 보이는 것 뒤에 숨은 실체를 알아내는 일은 바람직한 것일까? 그것도 뒤늦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집으로 오는 길은 언제나 질퍽질퍽한 시장 길을 지나야 했다. 어물전을 지나 풀빵을 파는 곳에 이르자 "어마, 너 아냐!" 누가 아는 체를 했다. 새침때기 선자였다. 무릎이 헤진 갈색 '고르뎅(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초가집 단발머리 커트를 한 선자는 이상한 아이였다. 동갑내기인데도 키가 한 뼘이나 컸을 뿐더러 나보다 몇 살은 더 먹은 듯했다. 또 함께 있어도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 딴 동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곤 했다. 선자가 손을 잡아 이끌었다. "우리 집에 가자!"
시장 통을 지나 다리를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한쪽 길은 비교적 번화한 중심가로, 다른 길은 산동네로 향하는 길이었다. 우린 외진 길로 접어들었다. 길가 구덩이에 쌓인 허섭스레기에서 매캐한 냄새가 났다. 조금 더 걸어가자 비탈진 곳에 검게 그을린 자국이 보이고 작은 쇠꼬챙이가 철봉막대처럼 걸려 있었다. 선자가 걸음을 멈추어 그쪽을 뚫어지게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른들이 저기서 술을 마셔. 개도 구워 먹더라니까." 콜타르 같은 검은 물이 흐르는 개울은 산동네 길을 따라 줄곧 이어졌다.
선자네 집은 처음 가보는 것이다. 짚 옆 작은 공터에 서 있는 큰 나무에 형형색색의 헝겊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찌그러진 싸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좁은 마당에 운동회 때처럼 '나이롱(나일론)' 줄이 엇갈려 매어 있고 색종이들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마당 구석에 놓인 큰 칼이었다. 작두의 날을 하늘로 향해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았다. 선자가 말했다. "난 저게 무서워. 엄만 날더러 올라가 보라고 하지만 말야."
순간 찬바람이 일며 물을 뒤집어 쓴 듯 소름이 돋아 쓰러질 뻔했다. 그 여자는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곳에 서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색동옷에 검은 조끼를 바쳐 입고 분칠한 얼굴에 입술이 붉었다. 주렴이 달린 갓을 쓰고 한 손에 방울을, 다른 한 손엔 부채를 들었다. 선자가 말했다. "우리 엄마야." 내가 꾸벅 절을 했는데도 여자는 못마땅한 듯 노려보았다. 선자가 엄마에게 달래듯 말했다. "엄마, 우리 반 아이야." 선자 엄마는 그제야 희미하게 웃더니 집 뒤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선자가 칼을 가리키더니 덧붙였다. "글쎄, 엄만 저 위에 올라가 춤도 춘다니까."
우리는 유리가 붙은 장지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과일과 떡, 무지개사탕 같은 형형색색의 모형 음식 몇 가지가 차려진 제단에 촛불이 켜 있었다. 앞쪽 조그만 소반엔 향불이 타고 있고, 물대접이 놓였으며, 꼬질꼬질 때가 낀 벽엔 신선을 그린 족자가 걸려 있었다. 크고 작은 보따리와 가방, 꾸러미가 여기저기 놓여 있어 어수선했다. 집에는 딱히 가지고 놀 만한 것이 없었다. 우리는 화투치기놀이를 했다. 짝이 맞지 않아 마분지를 오려 대충 모자란 장수를 채워 넣어서 인지 별로 재미가 없었다.
선자가 놀이에 진 내 팔목을 걷어 때릴 채비를 하다가 그만 두더니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우리 집엔 장난감이 없어. 그래서 혼자 있을 땐 불장난을 해. 성냥을 켰다 껐다 하는 것이니 놀이라고 할 것도 없지." 선자의 얼굴이 쓸쓸하게 변했다. "아까 일부러 기다렸어. 내일 이사 간단 말야. 너한텐 이야기해야 될 것 같아서." 그때 벽의 윗부분이 트여 알전구 불빛을 나누어 쓰게 되어 있는 옆방으로부터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선자가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순자 언니야. 물주고 올게." 선자와 사뭇 나이가 차이나는 순자 언니는 몹쓸 병을 앓고 있어 늘 누워 지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수상한 사람들이 차압딱지가 붙은 선자네 세간을 삼륜차에 실어 날랐다. 선자와 선자 어머니가 울며 매달리는데 순자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불구경을 하며 서 있었다. 선자네 집 너머 하늘에 동이 트고 있었다. 마치 질화로 속에 불씨가 번져나가는 것처럼 검붉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그 광경을 보며 서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잠시 후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나만 홀로 울고 있었다. 깨어 있다가 아침이 되면 제일 먼저 선자네 집으로 달려가리라 마음먹었는데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늦은 잠에서 깨어나 가보니 집이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매캐한 그을음 냄새가 나고 불티와 검불이 머리 위로 떠돌아다녔다. 마당 한 구석 큰 칼엔 재와 지푸라기가 수북이 쌓였다. "요것이 무슨 괴이한 일이당가?" "만신 집에도 불이 나남?" "보살은 이 판국에 어디 간 것이여?"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쯔쯧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데." 숯 검댕이 얼굴을 한 선자는 한 쪽에 주저앉아 울었다. 선자 엄마가 너울너울 춤추며 나타났다. 그 판국에 희죽희죽 웃었다. 그 뒤를 순경아저씨가 따라왔다. 불을 지른 순자 언니는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선자가 정작 이사 간 것은 며칠 후였으며 나는 그것을 뒤늦게 알았다. 선자네 집에 가보니 인부로 보이는 어른 두어 명이 파헤쳐진 검은 구덩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쪽에선 지게차가 연신 흙더미를 퍼 나르는데 먼지가 풀썩 날아올랐다.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나돈 것은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이다. 불은 지른 것이 순자 언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몸이 아파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불을 지를 수 있겠냐며. 나는 처음엔 흘려들었으나 그 이야기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사실의 배후에 감춰진 진실, 그리고 연민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 <<시에티카>> 2011‧하반기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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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8-22 1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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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무녀도'의 단면을 보듯, 그 감상이 아릿합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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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8-22 20: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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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문 선생님 답글을 보고 '선자'와 '乙火'가 같은 사람임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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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1-08-22 2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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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 특이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김선생님의 삶의 주변에 범상치않은 글의 소재들이 적지않음을 보며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합니다. 좋은 글 많이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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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8-23 10: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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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보다 더 한 체험을 수필로 옮길 때 고충을 느낍니다, 강승택 선생님.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질까봐서요. 그래서 오히려 극적인 체험을 덜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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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행원 |
11-08-22 2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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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기억을 서술하는 재능이 놀랍습니다.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부각시키는 총명이 대단합니다.
허허...참...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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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8-23 1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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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행원 선생님, 과찬이십니다. 그저 '그러했으려니...' 상상한 것 입니다.
컴푸터에 앉는 순간 모든 소재가 과거의 기억이 되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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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11-08-23 1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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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있어 추억은 생명수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실의 이야기보다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더 정감가는 것은 아마도 지나간 추억이 더 아름다워서가 아닐까요. 날이 갈수록 익어가는 선생님의 필체가 놀랍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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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8-23 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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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명화 국장님의 말씀 공감합니다. 그렇습니다.
추억은 글쓰기의 보고입니다. 특히 유년의 추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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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월 |
11-08-26 1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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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집 아이와 한 반이었던 선자가 의식있는 조숙함을 느끼네요.
아파 누워있는 순자 언니가 결코 방화의 범인은 아니 것 같고...
어쨌든 가슴 속에 한을 풀어 내는 게
불타는 집을 보고 후련해 하듯 우리들의 글쓰기도 어떤 의미에선 그런
카타르시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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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8-27 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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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인물에 대해 쓰는 것은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선자 이야기도 50여년 묵혀 두었던 것입니다, 김영월 부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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