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 김용순 |
날짜 : 11-08-13 09:51
조회 : 1922
|
|
|
|
3, 바이칼호
‘울란우데’를 벗어났으나, 하늘에 닿은 적송 숲을 빠져 나오지 못한다. 마침내 멀리 초원과 경작지가 눈길을 트여준다. 노란 배추 꽃밭이 더 넓어, 하늘을 물들이고 초원에는 양떼가 여유롭다. 목조주택들의 널찍한 텃밭에는 감자, 야채들이 신선한 햇빛을 받는다. 레이스로 장식된 창(窓)과 빨강, 노랑꽃이 피어있는 발코니, 유럽 농촌을 본다. 어디에서도 ‘겔’이 보이지 않는다. 유목민들의 정착으로 ‘겔’은 전설이 되었다.
황토 빛 도로는 자작나무와 침엽수림 사이를 강물처럼 흐른다. 하얀 살결을 수줍은 듯 들어낸 자작나무들과 붉은 얼굴에 큰 키를 자랑하는 적송 숲은 끝이 없다. 문득 차창으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바이칼로 오가는 여행객들이 잠시 멈추는 곳이다. 총림(叢林)속에서 하늘은 손바닥만 해졌다. 상쾌한 나무향이 몸 속 마디마디 까지 훑으며 들어온다.
긴 여정을 끝낸 강이 바다를 만나는 강구(江口), 작은 포구에 쉬고 있는 몇 척의 배들이 보인다.
아!, 드디어 우리 앞에 나타난 대해(大海)가 ‘바이칼’이다. 하얀 사장(沙場) 수백m가 펼쳐져 있다. 앞으로 어렴풋이 먼 산의 곡선들이 보이고, 옆은 어느 쪽도 수평선이다. 우리는 긴 바이칼의 허리에 닿았다. 두 손에 모은, 물맛은 전혀 짜지 않고 차갑기만 하다.
‘바이칼’은 현지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이다. 세계에서 제일 큰 담수호로 남북 640km, 동서 평균 50km, 남한 넓이의 약 1/3 정도이다. 제일 깊은 곳은 1600m으로 동해의 평균수심과 비슷하다. 바다에 서식하는 어류와 ’네르파‘라는 물개가 살고 있다하여 놀랐다. 먼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지각 변동으로 호수가 되었다 한다. 27개의 섬 중, 가장 큰 ‘알혼’섬은 동북아 샤마니즘의 시원지이다. 얼음이 얼면 다음해 5월에 녹으며 썰매로 반대편 쪽으로 건너 갈 수 있다한다. 건너편에는 러시아 황제에 반기를 든 근위장교들이 혁명에 실패, 유배 와서 건설하였다는 시베리아의 ‘파리’, ‘이루크츄크’가 있다.
호수를 끼고 북쪽으로 달린다. 울창한 침엽수 삼림은 끝을 모른다. 띄엄띄엄 숲에 묻힌 나무주택이 호수를 바라보며 풍경화를 그린다. 때로 작은 어촌마을과 휴양객을 위한 숙박시설도 보인다. 호수는 숲과 어울리기도, 높고 큰 바위들과 소금강(小金剛)을 연출하기도, 모래사장을 펼치기도 한다.
고사(枯死)목과 저절로 꺾어진 나무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며 숲속 구석구석, 바위마다에 전설이 서려있다. 금방이라도 곰, 호랑이가 불쑥 튀어나와 길을 막을 것 같다. 달맞이꽃, 나리, 민들레 등. 길옆 이름 모를 들풀, 야생화 하나도 낯설지 않아, 강원도 어느 산길 같다. 이 평온함과 친근감은 나의 유전자에 간직된 원초적인 귀소본능 때문일까?
이 물가, 이 숲이 우리 민족의 모태(母胎)이다. 또한 숱한 민족들의 자궁(子宮)이었고 다양한 문화가 시작된 곳이다. 1-2만 년 전 나의 조상은 이 근처 어디쯤에 살았을까? 춘원(春園)은 여기를 상상하며, 최석과, 지고지순(至高至順)한 사랑을 알고 그를 찾아 헤매는 정임을 이곳 어딘가에 떠돌게 만들었을 것이다.
바이칼을 만나고도 두어 시간을 더 달려, 투명한 햇살에 졸고 있는 호수 가 작은 마을에 멈춘다. 삼림은 마을을 감싸고 내려와 물가에서 멈추었고, 통나무 방갈로들이 띄엄띄엄 맑은 거울 위에 떠있다. 물위에는 고삐 묶인 하얀 배 두 척이 휴가를 즐긴다.
6시간이 걸려, ‘울란우데‘대학 휴양소에 도착하였다. 낮은 통나무 울타리 안으로 작은 방갈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우리 부부는 잔디마당 뒤편, 방갈로에 안내되었다. 문을 당기자, 향긋한 나무 향이 밀려나온다. 페치카 벽돌 외, 전부가 나무이다. 문고리, 옷걸이, 등등... 모든 것들이 상큼한 향기를 뿜어, 온몸이 금세 향기로운 바이칼 나무가 된다.
물에서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도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물로 뛰어든다. 물은 깊은 속까지 환히 들어내어 보이면서 얼음처럼 차다. 모래사장에는 호수에서 밀려온 물풀들이 쌓여있다. 이틀 전 큰바람이 불었고 파도높이가 5m나 되었다 하며, 때때로 고기잡이배가 사고가 나기도 한단다. 작은 체구의 러시아 노인이 장작 한 아름을 안고 들어와 페치카에 불을 지펴준다.
까만 하늘에 촘촘히 박힌 은하수가 호수 위에도, 삼림 위에도, 손바닥 위에도 쏟아 내린다. 호숫가 모래사장에 바이칼 나무로 모닥불이 피워졌다. 커다란 점박이 송어와 생선들을 큼직큼직하게 토막 내어 모닥불에 끓인다.
브레얏트족 교수 6-7명과 어우러졌다. 그들은 멀리서 온 객(客)을 호기심과 진심으로 환영한다. 우리는 안태본(安胎本)인 고향에 온 듯한 감정에 젖었고 그들도 우리를 먼 곳에서 온 핏줄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몇 병의 보드카가 비워지며 즐거운 술추렴이 호숫가의 밤을 채운다. 보드카에 취하면서 노래가 나온다. 나도 그 뿌리가 이곳에 있다는 아리랑을 불렀다. 그들은 아리랑이 낮선 것 같지 않다고 한다.
별들이 내려앉는 호수, 코끝으로 신선한 바람이 스치고, 모닥불이 타는 향긋한 내음과 싱싱한 생선은 독한 보드카를 부드럽게 넘어가게 한다.
장작을 한 아름 먹은 페치카는 아침까지도 미지근하다. 아침 식당에서, 어제 밤에 과음한 체육교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비틀거리고 다닌다. 과음 후유증에 시달리며 신비로운 자연에서 욕심내어 산소를 들이키며, 종일토록 새로운 기(氣)를 채운다.
|
|
| 강승택 |
11-08-14 00:58 |
 |
|
와, 바이칼호수까지 김선생님을 따라 숨가쁘게 왔네요. 은하수 쏟아지는 모래 사장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점박이 송어와 생선들을 보드카와 함께 드시다 ! 참으로 낭만 덩어리군요~원 없이 세상구경 즐기신 김선생님, 한 마디로 福도 참 많으십니다.
|
|
|
| |
| 김용순 |
11-08-14 14:57 |
|
|
강선생님, 역시 술꾼은 술이야기에 혹하시는군요. 나도 술마시는 시간들이 제일 행복하였습니다. 안주와 주위의 자연 분위기도 받쳐주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다음날 혼났습니다. 8월 느림회에서 꼭 만나도록 합시다.
|
|
|
|
| 박원명화 |
11-08-14 10:19 |
|
|
수 많은 여정을 걸어오신 기억들을 이렇게 좋은 문장으로 엮어가는 선생님의 글솜씨가 놀랍습니다. 선생님의 추억을 따라 함게 여행하는 느낌입니다.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올 이야기들이 사뭇 기대됩니다.
|
|
|
|
| 김용순 |
11-08-14 15:02 |
|
|
사무국장님, 너무 과찬을 해주셔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한 번 움직이기도 쉽지않고, 지나간 이야기나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 임병문 |
11-08-16 07:56 |
|
|
역시 김용순 선생님이십니다. 넘치는 정렬에 박수를 보냅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
|
|
|
| 김용순 |
11-08-16 09:59 |
|
|
임선생님, 날씨 고르지 못한 때, 잘 지내시지요? 이제는 흘러간 이야기나 하고 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시 움직이려고 하여도 이미 생활을 '안정' 모드로 바꾸어 버려 모든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달 느림회에서 한 번 뭉쳐 봅시다. 고맙습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