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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1-07-28 12:54
조회 :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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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幼年)의 헛간
영화 '아바타(Avatar‧分身)'는 감각적인 3D 입체화면으로 화제가 됐지만 내겐 자연과 생명체에 영성(靈性)이 깃들어 있다는 만유신(萬有神)적 관점이 더욱 울림이 있었다. 아바타의 키워드인 "I See You(나는 너를 느낀다)"는 자아와 대상, 존재자와 관찰자, 생명체와 또 다른 생명체의 순수한 소통, 교감과 연대를 뜻한다. 나는 영화에서처럼 나의 분신과 접속하여 또 다른 나를 수 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남쪽 고향 땅의 유년시절로 옮겨다 놓는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니 예닐곱 살쯤 되었다. 어느 날 헛간에서 보았던 광경을 잊을 수 없다. 어른들은 그곳엔 아주 큰 어른이 사신다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헛간은 햇빛이 들지 않는 뒤채에 딸린 허름한 건물인데다 두꺼운 통나무 대문에 빗장이 걸려 있곤 했다. 노(老)할아버지보다 더 큰 어른이 있다면 누구일까 궁금했지만 평소라면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 때 아이들과 어울려 숨바꼭질놀이를 하지 않았고 내가 새로운 숨을 곳을 찾지 않았더라면, 무엇보다 그날따라 헛간의 문이 조금 열려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빠끔히 열린 헛간의 문을 비집고 들어가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벽에 기댄 채 숨을 죽이고 있는데 찬 기운이 훅하고 끼쳐들며 소름이 돋았다. 이어 미약하게 '쉬싯' 소리가 났다. 순간 숨이 탁 막혔다. 구렁이! 나는 온몸의 힘이 빠지며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 판국에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뱀에게 얼른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기절했던 나는 마름 일을 보던 친척 아저씨가 떠메고 나왔다고 한다. 그 후로 헛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으며 큰 뱀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고 꿈에 나타나 경기를 일으키곤 했다.
옛 어른들은 흉측한 뱀 같은 동물도 내쫓거나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다. 한번은 감나무를 휘감고 있던 큰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며 느릿느릿 돌담을 타고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헛간에 있던 그 뱀인지는 알 수 없다. 그간 제법 머리가 여문 나와 또래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작대기를 휘두르며 내쫓으려 하자 어른들이 황급히 말리셨다. 둘러선 어른들은 애써 범상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어느 결에 오셨는지 할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는데 구렁이에게 말을 거는 성 싶었다. "마실가시는구만. 어서 둘러보고 오시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를 다녔다. 본집을 떠나온 때문인지 꿈속에 파충류가 나타나는 빈도도 줄고 가위에 눌리지 않게 되었다. 문득 기절했음에도 구렁이가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음에 생각이 미쳤다. 똬리를 튼 채 양반다리로 앉아 있던 큰 뱀이 노(老)할아버지를 닮은 듯 위엄도 있어보였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고 두려움을 온전히 떨치게 되었다. 수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구렁이가 당황하지 않았을까. 내가 갑자기 일상에 틈입(闖入)해 삶의 리듬을 깬 것이었으니.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삶의 터전이 있고 고유한 영역에 외부인이 침입하는 것을 꺼려한다고 하던데….
자신이 속한 집단과 특수 관계의 생물을 신성시하는 토템신앙(totemism)은 인간에 내재한 근원적 정서다. 누구나 깊은 소(沼)를 들여다보거나, 하늘이 보이지 않는 산속, 광막한 바다 앞에 서면 그곳을 주관하는 주인이 있는 듯 느끼며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선 듯 은은한 두려움과 신비함을 느낀다. 물에는 물의 요정, 숲에는 숲의 정령, 산에는 신령이 살며 각자 영역을 관장한다. 어른들은 뱀을 초월적 존재의 대리인, 또는 현신(現身)으로 보아 공경한 것이며, 돌아가신 조상역시 이미 신의 위계에 들어 창조주를 보좌하며 집안의 안녕과 후손을 보우하는 직분을 수행에 온 것이라 믿었다.
생각을 더듬어보니 한지와 삼베, 짚더미를 천으로 묶어 조리와 함께 대청 천정에 매달아 놓은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낭하에 크고 작은 독이 놓여있기도 했다. 할머니가 조심조심 독 뚜껑을 열 때 그 안을 엿보았더니 벼이삭과 거무튀튀한 쌀이 들어 있었다. "할마니, 요거이 무엇이당가요?" 내가 물어보자 할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신령님이 사신다고 말씀 하셨다. "하먼. 혹시라도 열어보지 말그라."
할머니 말씀이라 그런가 보다 여겼지만 왜 신령님이 별로 크지도 않은 어중간한 독 속에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청 천정에 매달아 놓은 조리가 집을 보호하는 '성주신'이요 장독대가 '철륭'으로 불리는 집지킴이 '터주신'임은 나중에 알았다. 안방에 사는 삼신 할멈, 부엌에 사는 조왕, 뒷간에 사는 측신, 외양간에 사는 우마신 등은 또 다른 식구였으니 우리가 살던 옛집은 인간과 귀신이 공존하는 작은 우주라 할 만하다. 조상들의 샤먼적인 정신세계에는 조화로운 삶과 우주적 합일에 대한 염원이 배어 있다.
효율이 중시되는 요즈음의 세태는 옛 같지 않아 제사도 이른 저녁에 서둘러 지내는 것이 낯설지 않다. 차례를 스키장 같은 위락시설이나 리조트에서 휴식과 여가를 즐기며 약식으로 지내는 일도 있다. 생활에 쫓기다 보니 서로 바쁘고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이라고 이해가 되는 한편 편리함만 좇는 풍조에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상례문화도 시대에 맞게 간소화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버리는데 너무 급급해 보존되어야 할 전통적 가치마저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첨단과학기술이 삶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조상들의 범신론(凡神論)적 믿음을 폄하하고 무시할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어른들은 전통신앙을 통해 집안의 평안을 빌고 조상에 대한 공경을 나타내었으며 이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외경과 함께 삶의 터전에 깃들어 사는 다른 존재에 대한 생명존중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불어 사는 삶을 중시한 옛 어른들의 신실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은 이기적이고 분화된 삶을 선호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깨우침을 주는 것이 아닌지.
* <<수필과 비평>> 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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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월 |
11-07-28 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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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살 때 비슷한 유년시절의 추억이 아주 또렷하게 묘사돼
놀랍군요. 단순히 샤머니즘적인 사고로 치부하기엔 우리 조상들 뿐만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삶의 양식인 것 같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라 범신론적인 사고를 인정하지 않지만
자연친화적인 삶의 모습은 우리가 본받아야할 가치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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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7-29 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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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월 부회장님 같은 열린 기독교인을 뵈오면 기쁘고 머리가 숙여집니다.
옛 어른들의 신실한 자세와 공생의 념(念)은 오늘에도 유효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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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11-07-29 0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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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시대 어른들은 그랬었지요
'내집을 찾는 손님은 반드시 따끈한 끼니 대접해서 보내기'
뜨거운 물을 하수구에 버릴 때면 "뜨겁다 피하거라" [아니면 식혀서 버리곤 했지요]
'끼니 때는 거지도 맨입으로 보내지 않는 법' 등등 매사가 정성이었지요
공감하는 바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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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7-29 1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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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고 말고요, 양순태 선생님. 더불어 사는 지혜가 아쉽습니다.
요즘은 자꾸 그런 정과 따뜻한 배려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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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1-07-29 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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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생님의 유년시절의 경험이 특이합니다. 독특한 작품 세계와 맞물려 조화를 이루는 탄탄한 배경도 부럽고요~ 재기 번뜩이는 김선생님의 일상과 함께 늘 좋은글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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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7-29 1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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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선생님, 말씀 자세히 나누지 못해 아쉽군요. 제가 한눈 파느라. 그만..^^
할머니가 동짓 무렵이면 뒤채 낭하에 팟죽을 흩뿌리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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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1-07-30 0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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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흥미를 끌게 하더니 더운 여름의 청량제 같이 서늘한 마음을 갖게 하네요. 저도 옛풍습에 관심이 있어 요즈음은 '세시풍속(최상수)를 구해 읽고 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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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7-31 2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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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세시풍속' 구해서 보려 합니다, 일만성철용 선생님.
그간 우리의 옛 풍습을 너무 모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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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7-30 1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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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 먼 훗날, 지금 세대들의 헛간에는 무엇들이 추억될까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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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7-31 2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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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 제게 위해를 끼치지 않은 건 기절하기 전 총기있게 인사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데요..., 임병문 선생님. '생명보험'에 든 것이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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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11-07-31 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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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의 세월도 오늘의 일도 작가들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글감으로 기억되는 것들이지요.
김선생님 작품이 점점 농익어 가고 있음에 감히 토를 달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늘 좋은 작품으로 독자와 가깝게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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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7-31 2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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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은 기억의 보고(寶庫)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박원명화 국장님.
이상한게도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어렸을 적 생각이 더 또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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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1-07-31 1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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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하면서 읽고 갑니다.
대단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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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7-31 2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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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말씀이십니까, 변영희 선생님. 오랜 만에 뵙습니다.
제가 선생님 글에서 많이 배우고 있는 것 잘 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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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1-08-01 1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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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고향이 시골이어서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김선생님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지 못했지요.
과연 어려서부터 작가의 싹이 트고 계셨음을 느끼게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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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8-02 0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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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이를테면 쇠락해가는 종가집이었답니다, 최복희 선생님.
얼마 전 신문에 '전국유명맛집'으로 집 주소가 나와 깜짝 놀랐습니다.
오랫동안 고향에 가보지 못했는데, 그간 음식점으로 바뀐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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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1-08-03 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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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가시는구만. 어서 둘러보고 오시게."
할머니의 그 말씀이 우리 민족정서의 바탕이 아닐는지요.
우리민족의 범신론적 정서는 만물을 인격체로 대하는 차원 높은 정신세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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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8-03 1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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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순 선생님, 그때 빙 둘러 서 있던 어른들의 표정이 숙연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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