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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용순 |
날짜 : 11-07-06 11:07
조회 : 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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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부부
전원카페와 갈비집들이 모여 있는 약수터 입구를 지나고 노송(老松) 숲을 지나오면, 산자락 옆으로 고즈넉한 들녁이 시야를 넓혀준다. 초겨울의 싸늘한 어둠이 들 가운데로 내려앉는다. 저기, 은행나무 아래 문제의 밭이 보인다. 벌써부터 가슴이 쿵닥거리기 시작한다. 얼마를 더 걸어와 드디어 현장에 도착하였다.
불안과 초조를 애써 진정시키며 사방을 살핀다. 아내가 재빨리 밭으로 들어가 비닐봉투를 끄집어내며, 엎드려 작업을 시작한다. 아내가 작업하는 동안 앞, 뒤쪽을 번갈아 살피며 전전긍긍한다. 아내의 작업이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져, 그만 끝내라고 큰소리로 다그친다.
아내는 무 네 뿌리를 뽑아, 미처 흙도 털어 내지 못한 채 봉투 속에 쑤셔 넣고 급히 밭을 빠져 나온다. 황급히 봉투를 건네받은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앞만 보고 걷는다. 실제 아내의 작업시간은 불과 2분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을 때리는 방망이질 소리를 들으며 정신없이 한참을 걷고서야 뒤를 돌아보는 작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아내가 종종 걸음으로 저만치 따라오고 있을 뿐 아무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봉투가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이곳은 인가와 떨어져 있고 행인도 띄엄띄엄 지나가는 한적한 농로(農路)이다. 밭의 주인도 이 근처에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지난여름 밭주인이 소형 트럭을 세워 놓고, 씨앗을 넣고 있었다. 그 이후로 매일같이 이 길을 지나는, 우리 눈에 한 번도 뜨인 적이 없었다. 일손이 모자라는지 무밭에 잡초가 무성하여도 돌보지 않았다.
어디쯤에서 흙을 털어내고 잎을 뜯어내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한결 가벼워 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 밭이 보이는 시계(視界)이다. 조금만 더 가면 굴다리가 나오고 그 위로 큰 도로가 지나간다. 굴다리를 지나면 여기와는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거기에서는 무를 끄집어내어 다듬어도 괜찮을 것이다. 혹 다른 사람이 본다 해도 조금 전 우리가 한 짓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근처 사슴목장 주인이 트랙트를 몰고 온다. 트랙트를 비켜 멈춰서있는, 우리가 들고 있는 봉투에 그의 시선이 꽂히는 것만 같아 불안하다. 굴다리를 지나와 포도밭 옆, 한갓진 길에서 정리를 하려는데 맞은편에서 할머니 한분이 오고 있다. 끄집어내려던 무를 도로 집어넣고 그대로 스쳐 지나왔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어둑한 길에서 아무것도 모를 할머니 때문에 그냥 지나오고 말았다. 결국 끄집어내지도 못하고 봉투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무 잎을 뜯어내어 길옆 풀숲에 버렸다. 봉투는 한결 가벼워 졌다.
2년 전, 시(市) 변두리 지역인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거실 곁으로 진달래와 초록과 단풍이 자리다툼하는, 고운 산이 한 발짝 다가 서 있고 뒤창 밖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는 넓은 들과 과수원, 호젓한 산책로는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산자락을 따라 논, 밭 사이로 나 있는 좁은 시멘트 농로를 따라 왕복 5km정도의 산책은 활기찬 일상을 주었다.
우리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작물들과 인사를 나눈다. 풋풋하고 싱싱한 그들이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온다. 노란 잎에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상추, 고추, 오이, 파 등 갖가지 야채들은 저마다 자태를 자랑한다. 이름 모를 들풀의 상큼함과 우리를 쳐다보는 소담한 들꽃들도 즐거움을 더해준다. 토마토가 지고 난 빈터에 작고 여린 배추 잎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가을의 얇은 햇살에 잉태하여 어느새 뱃속에 노란 잎을 가득 채우고 있다. 초록이 무성하던 무도 팔뚝만한 하얀 몸통이 흙을 밀쳐내고 박혀있다. 벌써 올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다. 연두색 떡잎이 자라 열매가 열리고 마침내 수확하는 동안 어느새 한해가 기울어가고 있다.
작년에는 배추 흉작으로 김장철에 금(金) 배추가 되었다. 농가들은 금년에도 좋은 값을 기대하며 배추농사를 많이 늘렸고 날씨도 풍년을 도왔다.
그러나, 생산량이 수요를 넘어 값은 폭락하였고 소득은커녕 수확 시 인건비와 운반비에도 미치지 못하여 그대로 갈아엎는다는 참담한 뉴스를 전하고 있다. 하얀 무서리가 내리고 살얼음이 두껍게 자라는 데도 애써 가꾼 무, 배추가 밭을 떠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웠다.
언제부터, 길가 쪽 배추들이 하나둘씩 보이지 않기 시작하였고 무도 뽑혀나간 자국이 점점 늘어갔다. 어느 날, 할머니 두 명이 뿌리와 겉잎은 남겨두고 노란속잎만 잘라 배낭 속에 넣고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우리를 의식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야단이라도 치고 싶도록 미웠다. 더구나 속잎만 잘라 가, 더욱 얄밉다. 다음날 겉잎들만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밭을 보니 허전하고 섭섭하였다.
아내는 ‘주인이 이미 포기한 것이 확실하고 그대로 두면 얼어서 영영 못 먹게 된다’며 우리도 서리를 하자고 한다. 다음날 비닐 봉투를 준비하여, 산책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목표물을 찍어 두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작업하기로 하였다. 배추는 이미 못쓰게 되어, 무를 정했다. 아내는 나를 배려하여 좋지 않은 일은 자기가 하겠다고 하였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바쁘게 집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 바로 저녁식사 준비를 하였다. 아내는 무를 가늘게 썰어 고춧가루와 식초, 설탕을 넣고 새콤달콤하게 무치겠다고 한다. 양념을 버무린 후, 간을 보아 달라며 한입 넣어준다. ‘식초가 조금 모자라는 것 같다’고 하자 식초를 조금 더 넣고 양념이 고르게 섞이도록 무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무치던 중, 생채가 토막토막 끊어져 부스러기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하다 잠시 후, 무가 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으나 이미 속으로는 얼어 있었던 것이다. 양념이 아까웠지만 전부 버려야만 했다. 불안함과 양심의 갈등까지 느끼면서 남의 무를 뽑아 먹으려 했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푸르고 싱싱하게 자라는 작물들이 전해주는 평온한 행복감과, 흙과 태양이 빚어내는 신비한 생명력은 세상살이에서 생긴 심신(心身)의 생채기에 새살이 돋아나게 해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특별하고 귀한 선물인데, 우리가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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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월 |
11-07-06 1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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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주택을 마련하고 주변의 들녘도 산책하며 가끔 무서리도 하신다니
정말 멋진 노후를 보내시네요. ㅎ ㅎ ㅎ
그 정도는 주인이 애교로 봐 줄텐데 너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 같네요.
실제로 얼어서 맛있게 먹지도 못하고 헛고생이었는데...
자연과 더불어 더욱 느림의 삶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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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1-07-07 0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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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회장님 저가 먼저 인사를 올려야하는데 죄송합니다. 무서리를 한번 해 보았는데, 그게, 심장이 많이 뛰더라고요. 요즈음은 산책길에서 만나는 동네분들에게 작물을 많이 얻어 먹습니다. 지난번 춘천, 양평에서는 여러가지로 감사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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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1-07-06 1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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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도 꾸지 못한 정다운 전원 생활을 이 글에서 봅니다.어디 사시는 분인가 새로 보내준 회원 주소록에서 찾아 보니 가평 분이시네요.귀농을 아내와 함께 하시는 것이 부럽습니다. 요증 아내가 어디 지방까지 따라 가는 세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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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1-07-07 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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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선생님, 먼저 인사 올려야 하는데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렇게 저의 글을 읽어 주시고 격려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입회한지도, 가평에 이사 온지도 얼마되지 않습니다. 낮에는 새소리, 밤에는 개구리 소리, 아직은 지낼만 합니다. 우리 집사람도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안부 여쭙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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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7-06 2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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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두루 부럽습니다. 그 생각과 시도가, 아직까지 우리 세대에는 그런 낭만과 추억을 울궈먹으며 살고 있지만, 이 세대가 막을 내리면, 그것은 범법이요 죄가 되는 삭막한 시대에 우리 후손은 살아가겠지요. 어쩐지 허망한 생각마저 드는 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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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1-07-07 0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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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생님,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어제 저녁에는 집사람에게 잡혀, 마늘 깐다고 답글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요. 이제 낭만은 점차 사라지고 팍팍한, 디지탈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역사는 흐르고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요. 강릉에서 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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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1-07-06 2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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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는데 두 분은 비교적 호흡이 맞으셨던 것 같습니다. ㅎ. 이미 수확을 포기한 밭이라면 느긋하게 작업을 하셔도 좋았을텐데 생각보다 배포가 적으시군요~ 또다른 전원생활의 묘미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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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1-07-07 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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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생님, 내가 배포가 작기는 작은 모양입니다. 그까짓껏 얼은 무 몇 뿌리가지고 그렇게 떨었으니까요. 만약 주인이 고발하면 파출소 가야지 어떡합니까? ㅎㅎㅎ 당시 집사람은 학교 선생님이 었는데요, 강릉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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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11-07-08 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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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벗하며 사시는 두 분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말이 도둑질이지 그건 수확하고 난 후 버려진 것이니 오히려 잘한 일을 하신게 아닌가요? 보기보담 정말 김성생님 배포가 작으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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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1-07-08 2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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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국장님, 수확하고 난 후 버려진 것이 아니라, 값이 너무 싸서 수확을 못하고 그냥 둔 밭이었습니다. 저가 눈이 작아 간이가 크다고 하였는데, 이제 늙어서 마음이 여려졌는가 봅니다. 자연과 벗하며 사는 것은 확실 하지만, 현관 밖을 나서면 늘 손에 흙을 뭍이게 됩니다. 농사짓고 잔디에 잡초뽑고, 농사가 얼마나 되느냐고요? 밭이 20평이나 되는 대농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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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계용 |
11-07-08 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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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을 읽어 내려가며 제 가슴도 콩당콩당이었습니다.
지금은 서리하기에 참 좋은 시간인 깊은 밤입니다.^^
저도 낮에 꽃구경을 갔었는데 첫눈에 반한 이름도 모르는 꽃 때문에 맘속으로는 수없이
그 꽃을 뽑고 싶었습니다. 이름을 알려 달래도 모른다고, 한 포기만 팔라고 사정해도 안된다고 해서 길가에 난 풀 같은 고 작은 보라꽃이 하필 오늘 거기에 기다리고 있었는지, 반갑기도 아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늘 담장 너머 바라보던 석류나무 한 그루와 고추잠자리 때문에 무지 무지 행복한 날이 되었습니다. 자연 안에 더욱 행복한 칠월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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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1-07-08 2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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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용선생님, 안녕하세요. 누구신가하여 회원수첩을 보니, 미국 사시는 것 같아요. 먼곳에서 저의 글을 읽어주시고, 말씀까지하여 주시니 더욱 반갑습니다. 아마 LA에 가까운 곳 같은데, 저희 막내 동생네도 거기에 살고 있습니다. 동생은 사업차 들락거리니 한번씩 봅니다만, 조카들이 무척 보고 싶습니다. 특히 우리 5남매의 자식들 중 유일한 딸하나가 그곳에 살고있어 더 보고 싶습니다. 아무튼 먼곳에서 외로움 잘 견디시고 건강하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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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1-07-13 1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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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뽑아먹다가 들린 놈"이라는 속담이 생각나 남몰래 웃어봅니다.
무라는 물건이 그렇습니다. 한두 개 뽑아먹다가 주인한테 들켰다하여
그게 큰 죄가 될만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무안한 노릇인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색한 정지화면이 되는 광경이 떠올라서입니다.
새가슴 견물생심마저도 넉넉한 인심으로 녹아드는 전원풍경이 행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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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1-07-13 2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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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순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비가 많이 왔는데, 피해는 없으신지요. 사실, 무 몇뿌리가 무슨 대수겠습니까만은 실지 주인이 가격 때문에 수확도 못하고 있는, 화풀이를 우리에게 한다면 무슨 망신입니까. 당시 집사람도 학교에 있었고요. 그래서 스릴이 있었습니다. 영낙없이 "무 뽑아 먹다가 들킨 놈"이 될뻔 하였지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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