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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강승택 |
날짜 : 10-11-06 20:47
조회 : 2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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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를 도모하다
가장의 가출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몰고 온 그 날의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과는 찻잔속의 태풍쯤으로 끝이 났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아내도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고 아빠에 대한 아이들의 인식도 달라졌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결 나긋나긋해진 아내의 태도로는 나름대로 성과가 있는 것도 같으나 시간을 두고 지켜볼 뿐, 성급한 판단은 자제할 일이다.
요즘 들어 부쩍 외로움을 느끼던 터였다. 늦은 저녁, 운동을 하거나 외출에서 돌아올 때면 마음은 언제나 어둡고 무거웠다. 사람들과 어울릴 땐 잊고 지내다가도 불 꺼진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설 때면 어느 먼 곳 무인도에라도 온 듯 외로움을 느꼈다. 아내는 항상 ‘당신은 집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기만 하면 된다.’고 돌 지난 아기에게 하듯 농담처럼 말하지만 온종일 오도카니 빈 집을 지켜야하는 입장에 서보지 않고서는 할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날만은 다르리라 믿었다. 모처럼 내려온 아이가 방안 전체를 환히 밝히고 맞아 주리라 생각했다. 본디 말이 없는 아이지만 ‘오셨어요?’ 한 마디 던지고 제 방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외로움을 날려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어지는 아들아이와의 저녁 식사는 또 얼마나 행복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 어긋나느라 그랬는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고 말았으니 자신은 물론 아이를 위해서도 낭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닫는 소리, 신발 끄는 소리. 거실을 지나며 잠시 멈추어 서서 방안을 둘러보는 인기척까지 어느 하나라도 느낌이 있었을 터이건만 아이는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한 가지 일에 열중하면 정신을 놓는 것이 아이의 특성이자 장점이라 여겼지만 사람이 들고 나는지조차 모르는 무신경이 그날따라 마음에 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쪽에서라도 분명한 신호를 보냈더라면 그런 사단이 나지는 않았을 것을 테니스 경기가 끝난 후 마신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괜한 오기를 발동한 것이 화근이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대충 씻어내고 주방으로 향하면서 그래도 아이의 저녁식사가 걱정이 되어 잠시 혼란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미 상처를 입은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그렇다고 모른 체 지나가자니 마음에 걸린다. 어정쩡한 기분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아내가 쟁여놓은 찬 그릇들을 주섬주섬 내놓으려니 청승맞다는 생각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받아본지가 언제 적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세끼 식사를 꼬박꼬박 내 손으로 차리는 일도 속이 편한 날은 즐거웠건만 오늘처럼 심사가 틀어진 날은 세상에 자신보다 불행한 이가 또 있을까싶다. 결국 이 모두가 집을 비우고 남편을 돌보지 않는 아내의 탓이라 결론을 짓고 만다.
곰곰 생각하니 서운한 일이 그 뿐이 아니다. 아내는 이 시각, 남편이 식사는 했는지, 하루해를 어찌 보내고 있는지 전화 한 통 없다. 하루 종일 일에 매여 동동거리는 아내의 일상을 모르는 바 아니나 지금은 그런 형편을 따질 때가 아니다. 딸아이만 해도 그렇다. 평소에는 전화도 잘만 하더니 요즘 들어 제 엄마를 닮아 가는지 딱 끊고 지낸다.
무관심한 아들과 아내, 그리고 딸, 무엇인가 경각심을 넣어줄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결정된 거사였다. 마음을 굳히기까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내딛은 발걸음이었다. 큰일을 위해 얼마간의 자금과 휴대폰은 필수일 것 같아 가장 먼저 챙겼고 길동무에 음악이상 좋은 것이 없으니 FM 라디오를 주머니에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파트 정문을 빠져 나오면서 그래도 아내에게 한 마디 통보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 휴대폰 숫자 중 1번을 길게 누르니 아내의 목소리가 뜬다. 이제 마무리 시간인 듯 전해오는 분위기가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응, 왜? ” 언제나 다름없이 편안함이 묻어나는 아내의 목소리에 순간 움찔했지만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나, 다시는 볼 생각 하지 마!” 되도록 자극적이면서도 충격적이라 생각되는 말을 골라 던진다. “무슨 소리야?” 상황판단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 하는 아내에게 다시 한 번 직격탄을 날린다. “다시는 볼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 왜?” 도전적인 언사를 남기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보지 않아도 아내가 몹시 당황해 하겠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이로써 첫 단계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이제는 발길 닿는 대로 떠나면 된다. 정처 없이 걷다가 공원 벤치에 누워 밤하늘의 별도 보고 낭만을 노래하리라. 노래 가사에도 나오듯 외로운 방랑자가 되어 먼 길을 헤매리라.
육교를 지나면 갑천이 흐르고 천변 길을 따라 쭉 걸으면 기차 정거장이 맞닿는다. 야간열차를 타고 대구든 부산이든 떠나보자. 대충 이런 그림을 그리며 걷고 있는데 저 만큼 치킨 집에서 플라스틱 의자를 내놓고 맥주잔을 나누는 사람들이 정다워 보인다. 문득 아내가 보고 싶다. 그 만큼 삶의 무게를 짊어지게 했으면 됐지 그도 모자라 남편의 투정까지 얹다니 이 무슨 철부지 노릇인가 정신이 버쩍 난다. 서둘러 전화를 거니 아내는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눙치는지 여유가 넘친다. “ 당신, 어딘데?” 듣기에 따라선 재미있어 죽겠다는 목소리로도 들렸는데 그다음은 나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잠시 후 서 너 명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엉킨 가운데 “아빠!”하는 딸아이의 목소리에 이어 “ 아버지 왜 그러세요? 많이 취하셨네-” 하는 묵직한 아들아이의 소리와 함께 “ 너희 아빠가 요즘 많이 외로우셨나보다” 하는 아내의 목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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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행원 |
10-11-09 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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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택 선생님, 거사를 하시려다가 실패를 하신 것 같군요...하하하...
이 다음엔 가출하시려면 평택으로 오십시요. 재워주고 맥여주고 친구되어 주고...
외롭지 않게 할테니까요...또 한번 웃음이 나오네...ㅎㅎㅎㅎ...
‘당신은 집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기만 하면 된다.’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모님의
부드러운 목소리...그 팔자가 부러운데...무엇이 또 부족해서....원..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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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0-11-09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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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나서고보니 갈 곳이 막연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윤선생님 계신 평택을 생각했더라면 상황은 또 어찌 바뀌었을지 모르는데 아쉽군요. 그나저나 윤선생님, 사방에서 축하의 인사가 들리던데, 저도 이 자리를 빌어 뒤늦게 마음의 꽃다발 드립니다. 항상 정력적인 삶의 모습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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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11-10 0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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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택 선생님,
오랫만에 뵙겠습니다.
그간 이런 일이 있으셨군요. 언젠가 보았던 어떤 TV드라마의 내용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그 존재감, 그것은 선생님의 것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온 가족의 절대적인
존재와 자존감일것이라 생각합니다.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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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0-11-13 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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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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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0-11-15 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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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한 페이지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정선생님의 독특한 경험은 선생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됩니다. 자세한 말씀 나누기에는 시간이 짧아 아쉬웠습니다만 미루어 짐작되는 점도 많았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지면을 통해 자주 만나뵐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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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0-11-14 1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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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때 가출한 적이 있습지요, 그런데, 아내가 윗동서네 식구들이랑 한 패가 되어 내 모든 돈 줄을 다 끊어 놓는 통에 마지막에 돈이 떨어져 노숙자 신세를 전전하다가 사실 소기의 성과는 올렸지만, 고생만 하고, 요즘 흔이 뜨는 " 집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만 실감하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암튼 재미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다시는 그런 거사는 생각도 하지 마시기를 흐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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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0-11-15 0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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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생님, 상상만해도 재미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엔 아내분의 처사가 지나치다고 생각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그 길만이 집나간 남편으로하여금 가정으로 복귀할 수 있게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되는군요. 늘 감사하고 사랑하십시오. 하늘 같은 아내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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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10-11-17 17: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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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를 도모하다' 고 하신다기에 깜짝 놀랐는데, 읽고 보니 공연한 객기를 부리신 것은 아닌지요. 가족이란 게 그렇더라구요. 곁에 있는 사람인지라 언제나 곁에 있는 게 당연하다 생각다보니 실상은 소홀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는 것을.....강선생님의 깜찍한 (죄송합니다)거사가 실패로 끝났으니 위로들 드려야 할지, 그래도 가족만큼 소중한 건 없겠지요. 12월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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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0-11-17 2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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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하는 이야기로 나이들면 남자는 어린애 된다지요? 이번 거사를 통해 반짝 효과를 보는듯도 했습니다만 그것도 잠시, 지금은 또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답니다. 말씀대로 다시는 쓸데없는 투정 안부리기로 굳게굳게 맹세합니다. 두루두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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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0-11-19 0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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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면서 훌쩍 떠나고 싶을때가 있지요.
그렇지만 나중에 이모저모를 저울질 하다보면 결행하기가 싶지 않지요.
거사가 실패로 끝날을지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건 그만큼 마음의
역동성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군요.
꾸준히 좋은글 선 보여주시니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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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0-11-19 2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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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도 치기어린 행동을 감행하다니 철이 들려면 아직 멀지않았나 스스로 반성한답니다. 임병식선생님, 그동안도 안녕하시지요? 지난 번 동인지 출판기념회에선 모습을 뵐수 없어 서운하더군요.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지면을 통해 자주 뵙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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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0-11-27 2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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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생님! ㅎㅎㅎ
전 무슨 큰일이나 났는 줄 알았습니다.
제목 보고.
아뭍은 독자를 끌고가는 문장력이 놀랍습니다. ㅎ
행복하신 투정 갔네요.ㅋ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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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0-11-28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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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웃으세요?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으셨나요? 아니면 거사를 도모할만한 사안이 못되나요? 어쩐지 저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시는 것같은 최선생님의 웃음 앞에선 무장해제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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