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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0-06-07 11:55
조회 :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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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만과 하이페츠의 저녁파티
김창식
적잖이 마음쓰이는 일이 있던 차에 옛날 '학원' 잡지에서 읽었던 미샤 엘만과 하이페츠의 에피소드가 생각났습니다. 1960년대 고등학교 다닐 때 박스 기사로 난 일화를 본 후 때때로 머리에 떠올리곤 하였기에 갑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기억을 되살려 내용을 재구성해 봅니다.
-- 어느 날 저녁, 엘만의 저택에서 파티가 있었습니다. 그 무렵 선배인 엘만이 한창 인기가 있었고, 하이페츠의 지명도는 엘만에 미치지 못하였지요. 파티가 무르익어 갈 때 집사가 엘만에게 한 통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편지 봉투에 ‘존경하는 바이올리니스트께’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엘만은 하이페츠에게 편지를 전해 주었고 하이페츠는 다시 엘만에게 되돌려 주었어요.
"이것은 선배님께 온 편지입니다.”
"아닐세. 여기 ‘존경하는 바이올리니스트께’라고 씌어 있지 않나?"
"하이페츠가 결코 동의했을 리가 없지요.
"아닙니다. 선배님이 호스트가 아니십니까?”
엘만도 물러나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존경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자네일세.”
서로 고사하며 결론이 나지 않자 편지를 함께 펴보았습니다 '존경하는 크라이슬러 선생님….'
이에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박장대소 했습니다 --
클라이슬러는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을 작곡한 그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제금가(提琴家)이자 두 사람에겐 대 선배인 셈입니다. 바위에 낀 녹색 이끼 같은 서정적이고 빈티지한 멋이 있는 미샤 엘만(Mischa Elman, 1891~1967)과 화려함과 정교함을 두루 갖춘 정통파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 1901~1987)는 음악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이름을 들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걸출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니까요.
천재적인 예술가는 자부심이 강하고 일부 괴팍한 면도 있다는 데, 두 사람의 비르투오소가 보여주는 티격태격은 유머, 유쾌한 반전, 훈훈한 우정이 조합된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느낌이어요.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대목은 우리가 살면서 잃기 쉬운 중요한 가치를 시사하는 듯한데, 그것은 바로 ‘겸손’이 아닐까 헤아려 봅니다. 질풍노도, 열정과 치기어린 패기의 시기를 지나 새삼 '겸손'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힘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나 살아오며 느낀 경험으로는 겸손함을 갖춘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안톤 슈낙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옛 친구와 만났을 때의 비애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가 존경하는 고관대작(高官大爵), 성공한 기업가가 되어 몽롱(朦朧)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操縱)하는 한낱 시인밖에 되지 못한 나에게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지 않는 태도를 취할 때.'
경조사나 동창회 모임에서 옛 친구를 만나면 '청라(靑羅)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하는 반가운 마음이 앞서는데, 세월의 무심함 때문인지 시큰둥해 하거나 건성으로 손을 내밀며 딴 청을 하는 친구로 인해 간혹 씁쓸한 적이 있었습니다. 큰 부(富)를 이루었거나 누구든 알만큼 출세한 전‧현직 명사 중에 그런 사람이 눈에 띄는 데, 주위엔 늘 한 무리의 추종자들이 그를 섬처럼 옹위(擁衛)하고 있더라고요. 그와의 친분을 애써 강조하며 세(勢)를 과시하듯.
어느 방면에서건 경지에 오른 사람이 겸손하면 진한 감동을 주지만, 이는 참으로 도달하기 버거운 과제인 듯합니다. 획득하고 쌓은 것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는 새 오시(傲視)하는 습관이 몸에 배는 것이 인간의 불완전한 측면일 터여서요. 겸손의 실천은 사회의 그늘진 곳을 응시하는 따뜻한 시선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좋은 위치를 선점한 상태라면 더더욱 뒤처진 이웃에 대한 깊은 이해,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뿐더러 수시로 뒤돌아보며 자신을 추스르고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겸손'은 '순수(純粹)'와 같아서 행여 '어부의 그물에 걸린 은빛 고기'나 박남수 시인이 말한 ‘포수(砲手)의 조준경(照準鏡) 속으로 날아드는 새’와 같지 않을까 괜한 걱정도 해 봅니다. 겸손하게 대하면 무시하고 만만히 보며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무엇을 이루었다 해서 우쭐대지 않고 주위 여건이 불비(不備)하다 하여 낙담하지 않은 성숙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이 혼자만의 바람은 아니리라 생각도 해 보지만…….
제겐 살아오면서 작은 성취라도 이루게 되었을 때, 아니면 주변이 온통 뒤죽박죽이어서 마음이 스산하고 어지러울 때면 엘만과 하이페츠, 두 거장의 일화를 떠올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마치 제가 그날의 파티에라도 가 있었던 듯 마음이 훈훈해지고 스스로를 살펴보게 되더라니까요. 덤으로 용기도 생겨나고요.
*<<21세기 문학>> 여름호(2010) 수록.
김창식
nixla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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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행원 |
10-06-07 2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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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언제나 학구적인 모습이 대단하십니다. 특히 삼국지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가견을 가졌고,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하여 종횡무진 이야기를 엮어내는 재능 또한 부럽습니다. 특히 이번의 글, 60년대에 학생잡지 '학원'에서 읽었던 기억을 되살리어 이야기를 구성해 내는 솜씨가 놀랍습니다. 1950년대 아득한 옛날, 나의 문학에 대한 갈증을 풀어 준 유일한 잡지 '학원'은 지금도 나에겐 아련한 노스탤지어(nostalgia)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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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6-08 0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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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지의 '명사유머모임'에 소개된 일화로 기억합니다, 윤행원 선생님.
'삼국지' 는 제가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아 쓰면서도 사실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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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0-06-08 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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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선생님, 그런 파티 주관하시면 좀 불러주세요.
흐뭇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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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6-08 0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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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화 선생님을 필두로 우리 작가회 선배님 모두에게 초청장 발송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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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우 |
10-06-09 1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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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선생님!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글은 많이 공부하시고 쓰셨음이 느껴져 저를 반성하게 하기도 하는군요^^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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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6-10 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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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기억을 들춰내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건우 국장님, 우리는 같은 학년 같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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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0-06-10 0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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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참 뜸해 궁금했습니다.
요즘은 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어 낯설은 글을 써야 독자들의
시선을 끈다고 하지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아는만큼 보이고 아는만큼 글도 쓰게 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좋은 많이 읽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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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6-10 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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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최복희 선생님 글이 새롭게 다가오는 걸요. 어서 글 보여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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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0-06-11 09: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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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지금 정년퇴임한 후로 낮아질대로 낮아지려고 합니다. 세월의 흐름때문인지 더욱 더 낮아지지 높아지지는 안을것 같습니다. 한없이 낮아지다가 어느날 갑자기 지하로 가는 것은 아닌지 ㅎㅎㅎ 아무튼 우리 인생은 출세 아니면 부자가 되어야 대접받는 세상 인심입니다. 그렇지 못함에도 나를 좋아하는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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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6-11 1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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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사람 사귀기가 점점 힘들어 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가족과 몇 사람 친구가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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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승 |
10-06-13 0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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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상대를 서로 배려해주고 존중해주는 거장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상하게 인간관계에서는 자신을 낮추면 오히려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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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6-14 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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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선생님, 미샤 엘만은 클래식 소품 연주가 특히 빛났고
하이페츠는 우리나라에도 온 적이 았어 더욱 친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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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10-06-14 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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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리라 봅니다
무엇보다 수필가로서 김창식 선생님의 인간미가 가미된
수작중에 특별작으로 기억 될 것입니다
'위대한 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쓰면서 동시에 자기 시대를 그린다'
그 참된 명언을 되새겨 보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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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0-06-14 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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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뵙는군요. 양 선생님 말씀대로 자신에 대해 쓰면서
사회성과 시대정신이 은은히 배어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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