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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 2010년 8월호 게재)

손녀에게 받은 상장

최 복 희

어버이 날, 우리 가족은 초등학교 1학년인 외손녀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나에게는 글을 쓴다고 ‘수필상’을, 바둑을 좋아하는 남편에게는 ‘바둑상’을, 영어를 잘하는 아들에게는 ‘영어상’을 주었다.
내 상장의 내용은 파란색종이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할머니 저를 길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쑥쑥 큰 것은 할머니 덕분이에요. 사랑해요.’이다.

어떤 금박 물을 들여 인쇄한 상장이 이보다 아름다울까. 수필로 등단할 때 받은 크리스털 상패처럼 빛나진 않지만, 그동안 손녀를 키우느라 힘들었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 사라지게 했다.

아이가 없어 조용하고 이야깃거리가 없던 우리 집에 손녀는 사람 사는 집으로 바꿔 놓았고 꽃이 되었다.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더니 더욱 의젓해졌지 않았는가. 내가 제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다 알고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손녀는 딸이 직장을 나가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내가 데려다 키워왔다. 사실은 딸애가 결혼하기 전부터 ‘네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더라도 건강 부실로 내가 봐주지 못할 것이라’라고 넌지시 귀띔해 놓았고, 딸애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었다. 막상 시집가서 아이가 생기니 다짐했던 말들은 헛말이 되고 말았다. 배운 만큼 자아실현을 해보겠다는 것이 딸애의 꿈이며 직장을 버리고 집안에 들어앉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녀를 데려온 뒤로 나는 문학 공부도 그만두었고 지역 문인협회 활동도 접었으며 친구들과의 만남도 전화나 이메일로 대신 했다.
내 아이들 어렸을 때는 사는데 바빠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다. 이제는 시간도 경제도 그전보다 여유가 생겼으니 딸에게 해주지 못한 정성을 손녀에게 쏟아주고 싶었다. 어린 것을 떼어놓고 직장에 나가는 딸의 입장을 생각해 어미 못지않은 사랑으로 키우리라 결심 했다.

그렇지만 아이 보는 데 젖어 살다보니 때로는 허무감이 들기도 했다. 촌부가 되어 30여 년간 젖소를 기르며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젊음을 소진했다. 천직으로 삼았던 그 일을 거두고 나를 찾아 대우하며 살겠다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었는데, 애나 보는 늙은이로 전락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몇 해 전에 수술한 오른쪽 어깨가 도져 재수술을 받는 고통도 겪었다. 성치 않는 팔로 아이를 안고 업는 일이 무리가 되었지 싶다. 그때 딸에게 네 자식 네가 키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았다. 딸 내외도 고심 끝에 아이 하나만 낳아 잘 키우겠다며 나를 믿고 맡기지 않았는가.

하루하루 손녀의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그 마음은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기쁨은 한량없었다. 한 예를 들면 어쩌다 내가 손가락을 다쳤을 때, 아장아장 걸어와 얼마나 아프냐는 듯이 팔을 어루만지며 호호! 불어주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런데 어느새 커서 또 이렇게 할미를 생각해 주니 고 마음이 고맙지 않은가.
한낱 종잇장에 불과한 상장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받은 그 어떤 상보다 값지고 볼수록 감동을 준다. 나는 왜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손녀가 시험을 잘 보거나, 착한 일을 하면 예쁜 색종이에 착한일한상, 공부잘한상 등을 만들어서 주어 보련다.

상장은 칭찬을 포함하여 주는 이의 마음을 담은 증거물이다. 손녀가 내게 특별히 ‘수필상’이라고 이름을 붙여 준 것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어린 게 내가 짬짬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예사로 보지 않고 있다가 상을 주었으니.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동안 내가 손녀 앞에서 옳지 못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했다.

요즘 항간에 떠도는 말 중에 ‘어리석은 할머니 시리즈’가 있는데 그 중에는 손자 손녀 봐주는 할머니도 끼어있다.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 되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새로 생겨난 말이지 싶다.

나도 그 축에 속하지만 이순이 지난 나이에 이보다 보람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힘은 들지만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느낀다. 손녀에게 받은 상장으로 나 하나 편하자고 허황한 욕심의 갈등에서 헤매던 내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내 건강이 이만해 손녀를 돌볼 수 있어 다행이다. 사람 하나 잘 키우는 것은 위대한 예술이라는 말도 있다. 손녀가 반듯하게 자라도록 힘닿는 데 까지 돌봐 주고 싶다.
아이의 정성이 묻어나 입가에 웃음을 번지게 하는 상장을, 우리 내외는 오래 두고 보려고 코팅을 했다.
 
아이가 내게 기쁨과 감동을 안겨 준 것처럼 나도 그런 수필을 써야하지 않을까. 손녀가 준 상장으로 얼룩진 내 마음의 창이 말끔히 씻겨 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