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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내려가라 하네

류인혜
innhea@hanmail.net


일상을 떠나 다른 무엇이 그리워 집을 나선다. 청학리에서 당고개를 운행하는 마을버스는 수락산 자락에 난 길을 따라 달려 옛날 내시들이 모여 살았다는 순화궁 고개를 넘고, 골이 깊고 산이 험하여 호랑이가 나타났던 덕능고개를 구불구불 힘차게 올라간다.
우연히 발견한 조선시대 문장가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글에 형제들과 함께 노새와 나귀를 타고 수락산을 구경한 내용이 있다. 수락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자고 이튿날 돌아오는 길에 덕흥(德興)대원군의 산소를 배알했다고 했다.
“대원군의 산소는 판돈(判敦)의 묘를 앞에 두고 대원군의 큰 아드님이신 하원군(河原君)의 묘가 뒤에 있어 앞뒤로 받쳐주고 있었다. 그러나 판돈의 묘는 그 비문만 읽고 봉분은 보지 않았고, 하원군의 묘는 그 비문을 읽고 봉분도 보았지만 절은 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흥국사에서 점심을 지어 먹었다. 중년의 선비는 이 나들이에 대해 세세히 기록하며 그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이 한 가지도 같은 것이 없어 이 같은 일은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아니라면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별내면 쪽에서 덕능고개를 오르기 전 덕능마을이 있는 오른편에 덕흥대원군 묘소와 흥국사가 있다. 십여 년 동안 그 옆을 지나다니면서도 아직 흥국사에는 올라가 보지 않았다. 옛사람의 글을 읽고 난 후에는 반갑고 신기해서 나도 그곳에 가서 한나절 머물고 싶어졌다.
그 두 개의 고개를 넘어 가서 또 당고개라는 전철역 이름을 대하면 저절로 숨이 찬다. 더구나 역사가 높이 있어 계단 많은 전철역은 신개념의 고개이다.

높은 산을 오를 때마다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몹시 궁금했다. 이제는 산 밑으로 터널이 뚫렸지만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 이화령을 넘어갔다. 절벽으로 떨어질 듯 아슬아슬 돌아가는 산길은 마을에서 점점 멀어지고 또 다른 마을을 가까이 끌어왔다.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저 멀리 사람 사는 동네가 보였다.
그렇게 옛사람들이 다니던 산길은 문물과 소식이 오갔지만 무섭고 불편했다.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서 넘던 문경새재의 옛길이나 무등산의 옛길은 좁고 가파르게 보여 들어 설 엄두를 못 내었다. 그리고 유명한 구룡령 옛길은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도 경사가 급해서 내려갈 때 어렵다고 겁을 주어 포기했다. 근처까지 가서 올라갔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약수터에서 서성거렸다. 오르면 내려가야 하는데 내려가는 길이 어려워 갈 수 없는 것이다.

강원도로 가기 위해서 넘어본 고개는 미시령과 한계령이다. 마음에 심어진 한계령은 설악산을 오가기 위해서 넘는 고개가 아니라 사람의 흔적을 따라가는 길이다.  한계령하면 그 노래를 잘 부르던 문우 유희남이 떠오르고 또 한계령하면 그 노래를 작곡한 사람이 저절로 떠오른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외로운 얼굴이다. 하얀 피부를 가진 그들은 가만히 웃고 있어도 가을처럼 쓸쓸했다.
<한계령>은 사람을 떠나 산으로 올라온 사람의 외로움이다. 또 앞으로 성큼성큼 걷지 못하는 쓸쓸함이고 버려야 될 것을 숨기는 가슴 저리는 이별이다.
십여 년 전 희남 선생이 떠나자 눈앞이 막막해져 그의 죽음을 일부러 외면했다. 모두들 슬픔을 나타내며 그를 기릴 때, 멀리 서서 묵묵히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보내주어야 그도 하늘에서 평안할 것이라 여겨 금산으로 찾아갔다. 큰 시비와 함께 단장 된 산소 앞에서 머리를 숙이니 가슴에 묻어둔 회한이 쏟아져 내렸다. 묵혔던 슬픔은 숙성이 되어 독주처럼 매웠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당연히 그가 잘 부르던 한계령 이야기가 나왔다. 부군 박 선생은 이야기 했다. 떠나기 전, “살아있을 때 한계령을 꼭 보고 싶다.” 간절히 원해서 간호원까지 대동하여 그곳에 갔었다고. 그는 한계령의 무엇이 보고 싶었을까, 아니 어떤 말로 작별인사를 했을까. 한계령에 우뚝 서서 곧 닥쳐온 죽음의 거센 바람과 맞서고 있는 여인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노래의 가사에도 있듯이 산은 사람에게 그곳에 있지 말고 사람의 체온이 따뜻한 곳으로 가라고 한다. 산은 사람을 품어주지 않는다. 냉정하게 산에서 내려가라고 한다. 아무리 힘겹게 올라가도 마땅히 내려와야 된다. 높은 재와 낮은 고개를 넘으며 경험하는 만남과 이별은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또 다른 기막힌 문장이다. 柳
                                                                          - 《수필시대》2013년 51호




柳仁惠(류인혜)
* 1984년 수필 <우물>로『한국수필』봄호 추천완료. 수필집:『풀처럼 이슬처럼』,『움직이는 미술관』,『순환』,『나무이야기』. 시집:『은총』. 인문서: 류인혜의 책읽기『아름다운 책』.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펜문학상(수필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