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가는 일이 빈번하지 않았던 시절, 세상에 태어나서 초중고 시절을 거쳐 진학을 위해 타지로 가거나, 직장이나 결혼을 위해 집을 떠나기 전까지 적어도 태어나 자란 그 한 집에 오래 정붙여 살던 시대의 이야기다.
요즘이야 주거공간이 대부분 아파트에 국한 되지만 우리 어린 시절은 마당 넓고 시원한 집, 감나무 한 그루 장독대 부근에 자리 잡고 있고 화초처럼 심어놓고 즐기는 앵두 석류 등이 울타리 근처에, 그리고 다년생 식물과 각종 일년초들이 앞뒤마당을 화려하게 장악하고 있어 집안에 들어서면 평화와 다정함을 느낄 수 있는 정경이 쉽게 펼쳐지곤 했다.
넝쿨식물 종류로는 민물가재 가슴팍에 엉겨 붙은 알처럼 좁쌀알갱이보다 조금 큰 열매를 수없이 매달고 있는 포도나무와, 하얗고 앙증맞은 꽃이 진 자리에 귀엽고 작은 초록 등이 조롱조롱 달린 등나무, 노란색 꽃이 과히 멋스럽지는 않아도 수더분하고 믿음직한 성정이 엿보이는 수세미, 아침이면 꽃봉오리를 펼치고 활짝 미소 짓는 분홍 하양 보라색의 사발나팔꽃, 여리고 우아한 순과 귀족적인 품위를 논해야 할 만큼 중후한 꽃을 피우는 더덕넝쿨 등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어머니가 매어놓은 줄을 타고 화단에서 지붕위로, 나무 울타리로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푸른 하늘과 구름을 목표삼아 기를 쓰고 올라갔다.
올라가는 놈 외에도 화단엔 글라디오라스 백일홍 맨드라미 금송화 채송화 봉숭아 과꽃 원추리 난초 홍초 목단 국화 등이 모종이라도 부은 듯 심겨져 꽃동산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달리아 꽃이었다. 덕성스럽고 소담한 모양새에 대해서는 목단, 일명 작약이라는 꽃이 먼저일 터이지만 왠지 모르게 꽃송이가 크고 탐스러워 자주 눈에 뜨이기는 했어도 나는 목단 보다는 달리아를 더 애호했던 게 아닌가 여겨진다. 꽃이 크고 꽃잎이 여러 겹 포개 있는 점에서는 목단이나 달리아는 매우 비슷한 형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화단의 다른 많은 꽃 중에서 제일 예쁜 꽃을 추천하라 한다면 나는 단연 꽃 잎 배열이 가지런하고 깔끔한, 그리고 기쁨을 머금었으되 함부로 드러나지 않고 정숙한 모습을 지닌 달리아를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꽃동산의 운치는 달밤에 더욱 고조되는가 싶었다. 넝쿨식물의 포근한 외호(外護) 아래 밤의 그늘에 살짝 가린 듯한 화단 권속들의 자태는 그들이 말 못하는 식물이어서 하등의 답답함은커녕 낮 시간보다 더욱 속 깊은 밀어를 인간들에게 전하여 주는 듯 했다.
꽃을 바라보는 동안 가슴 저 안쪽으로부터 불길처럼 솟구치는 환희와 열락을 토로할 길 없어 마침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처음엔 그저 조용하게 허밍으로 시작한 것이 독창, 열창의 화려한 무대로 변화하는 게 아닌가.
우리집 화단가에서 처음 울려 퍼진 노래는 바로 옆집 최 변호사 네의 바이올린을 전공한다는 큰 언니와 그녀 남동생의 화음 잘된 ‘즐거운 나의 집’ 의 명랑한 분위기로 이어지고, 다음은 시청 공무원인 앞집 영일이네 아버지의 ‘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로 흘러간다.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보이던 영일이네 아버지의 고향은 그리워도 쉽게 가볼 수 없는 삼팔 이북이었던 것일까....그렇게 노래의 앞뒤 연결 면에 있어 다소 어색한 구석이 감지되기는 해도 흥겨움 그 하나를 강조해서 말한다면 역시 달밤이라는 천연의 조명과 함께 서운동의 낭만은 제대로 무르익어 갔다.
계절마다 피어나는 온갖 꽃 속에서 여러 형제가 어울려 무럭무럭 성장했으며, 이웃과도 돈독한 정리를 쌓아가며 유복한 시절을 살아낸 일, 꽃 피고 달 밝은 밤이면 뉘 집이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 소리가 선인장 꽃봉오리 벌듯 은밀하게 온 동네에 울려 퍼지곤 했다. 달 밝은 밤에 꽃과 사람이 한데 어울려 창조해낸 서운동 교향악이었다고나 할까.
서운동의 추억과 낭만이 지금 와 사무치게 그리운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아니어도 나무와 꽃이 어우러진 자연 속으로 귀속하여 하늘과 땅, 사람이 협연하는 서운동 교향악을 재생해볼 수 있다면 내 생애 더 무엇을 바라랴!
(문학의 집 서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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