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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희순 |
날짜 : 13-07-11 07:53
조회 :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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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과 청려장
여름내 봐두었던 명아주로 어머니께 지팡이 하나 만들어 드렸다. 키도 꼭 맞고 과연 가볍기도 하다며 어머니는 참 좋아라하셨다. 한참을 지나 아버지 기일이라 집에 들렀더니 청려장(靑藜杖)은 간데없고 낯선 나무 지팡이가 마루 끝에 기대어 멀뚱거린다.
“접때 드린 건 어쩌고요?”
“자석한테는 지팡이를 받는 거이 아니라 해쌓데… ….”
끝내 가망이 없어 한 달 만에 구급차에 실려 퇴원하신 아버지는 이 자식이 완치되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또 다른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고 아버지보다 한 주일 후에 병원 문을 걸어 나왔다.
“아버지”
곱게 빗어 넘겨진 단정한 은발에 수심이 깃들어있던 얼굴에 안심하는 빛이 스쳐갔다. 입이 마르고 숨결이 자꾸 잦아든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숟가락 물로 연신 입을 적셔준다. 나는 견딜 수 없어 자리를 뜬다. 작은방 바람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섬광이 머릿속을 관통한다. 앗, 나는 튀어 오르는 용수철이 되어 큰방으로 몸을 돌이킨다. 지금 아버지가 운명하셨다.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유언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유언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알아주는 상쇠이자 숙수(熟手)였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빠진 매구 판은 신명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마을 대소사에 큰상을 차리는 일은 아버지가 도맡아 하셨다. 또 문어조(文魚條)의 달인인지라 근동 혼인잔칫집의 초례상(醮禮床)에 올려진 기품 넘치는 봉황(鳳凰)은 다 아버지 작품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문어오림을 하실 때면 문어발 한 조각이라도 남기를 기다리며 잠을 쫓곤 하였다. 나는 기껏 배코칼을 갈았을 뿐 아버지의 솜씨를 한 가지도 물려받지 못했다. 아버지 기일이면 좋아하시던 술 한 잔 올려드리지 못하는 추모예배가 더욱 숙연해진다.
“얘야, 밤은 깎는 게 아니고 치는 거란다.”
아버지는 갈 데 없는 시골 농부였지만 겨울철에는 이틀이 멀다하고 달구지꾼이 되어 바위처럼 듬직한 부사리와 함께 꼭두새벽 삼십 리 길을 나섰다. 달구지는 60년대 시골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짐차’였다. 일백마흔다섯 근(87킬로그램) 쌀가마는 열다섯이 한계였고 볏짚은 천 뭇까지도 실을 수 있었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안날 달구지에 미리 짐을 짜놓아야 했다.
아버지를 마중 나가는 밤이면 사립문밖에서부터 금세 귀신이 뒤를 밟았다. 별들은 너무나도 멀리 있어 깜깜한 천지를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별들의 불가사의(不可思議)는 오히려 내 발길을 어지럽히고 눈에 익은 몇몇 성좌만이 세상의 먼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등불은 발부리에서만 서성이니 사위에서 선뜩선뜩 두려움이 넘보았다. 칠흑의 밤은 숲속 시커먼 소나무를 걸리고 바위에게도 영혼을 부어주어 나를 무섬증에 빠뜨렸다. 한쪽 손으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부여잡아도 내 발소리는 귀신으로 변절하여 끊임없이 꼭뒤를 노렸다. 산 속 후미진 가풀막 몇 굽이를 돌아 오르며 숨이 차도 나는 고개 한 번 들지 못했다. 등불을 잡은 시린 손끝을 견디며 이제나 저제나 워낭소리가 들려오기만을 비손하였다.
어둠을 가르는 것은 수많은 별빛도 아니고 등불도 아니고 우리 부사리의 워낭소리였다. 들린 듯 끊어지며 애를 태우며 점점 가까워지는 그 맑은 워낭소리는 어둑시니를 여지없이 물리치고 온갖 귀신의 미행을 단죄하고 바위와 나무들마저 잠재웠다. 아버지를 부르며 우둘투둘한 자갈길을 내달리면 등불도 나를 따라 춤을 추었다. 아버지는 으레 부사리한테 짚신을 신기고 두 켤레 여덟 짝을 따로 마련하여 길을 나섰으며 빈 달구지도 타는 법이 없으셨다. 그래도 내겐 철부지의 보람이 있었으니 마중을 멀리 나갈수록 더 오래 달구지를 타고 올 수 있어 좋았다.
아버지를 마중 나가는 밤마다 들었던 그 맑고 규칙적인 워낭소리는 내 마음 깊은 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는 이순(耳順)을 바라고서야 소리도 빛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랬다, 소리의 빛 바로 ‘광음(光音)’이었다. 저 색계(色界)의 광음천(光音天) 사람들은 생각만 하여도 그 입에서 맑고 깨끗한 빛이 나가 의사를 소통했다고 한다. 성경은 사람의 영혼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빛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는 옛 시절의 아득한 워낭소리를 빛이라 일깨워주신 절대자 앞에 부복한다.
어머니는 만 간데 삭신을 한줌이나 되는 알약으로 추슬러 이러구러 거동을 하시니 내겐 핑계거리가 맞춤이다. 조석문안은 새로에 안부전화조차 가뭄에 콩 나듯 하니 한 동리에 살아도 구만리 지척이다. 올해에도 튼실한 명아주 두 그루를 뿌리째 뽑아 간수해두었다. 지팡이를 만들어 사촌한테라도 부탁하여 넌지시 드려볼 속셈이다. 그러나 나는 이내 깨달았다. 청려장이 제아무리 좋다한들 ‘자식 지팡이’에 댈까. 나는 보잘 것 없는 청려장으로 어머니를 고려장(高麗葬) 하였다. 이제는 내가 청려장이 되어 가슴 속 워낭을 꺼내 시간 맞춰 흔들면서 길을 나설 일이다. 추억을 머리에 이고 늙으신 어머니 치맛자락 다시금 부여잡고.
워낭소리가 들려온다. 청려장에 움이 튼다. 새로운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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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3-07-11 0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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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현재에 접목된 이야기네요. 제 세대에도 생소한 우리의 전통적인 기구와 언어이니 이는 오래 오래 간직하여 둘 글을 쓰신 것 같습니다.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구구절절 묻어나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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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3-07-11 1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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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은 4년 전 어느 수필지의 창간호에 발표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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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3-07-13 0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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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게 아버님 생각 어머님 생각이 납니다. 두 분 다 하늘나라 가시고, 제가 장남이니
아파트 청약순위로 말하자면 영순위 입니다. 저도 조금씩 조금씩 떠날 준비를 서둘러야 할 때라 생각하며 가슴이 뭉클해 옵니다. 감사합니다. 이희순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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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3-07-18 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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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때가 언제인데 준비를 하신다는 것입니까.
인명은 재천이오니, 선생님, 오늘도 청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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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3-07-13 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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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멋져라! 자식 청려장!
명아주는 나물로도 먹는 데 그 명아주로 직접 청려장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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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3-07-18 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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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그저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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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3-07-22 0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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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도 새로움이 있고 좋습니다. 농촌정서의 면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 정겨움이 더합니다. 전부터 자식이 부모님의 지팡이는 만들어 주시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걸음걸이가 불편하신 것을 보고 외면할 자식은 없겠지요. 들길을 걸어가면서 내는 일소의 워낭소리가 새삼 그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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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3-08-04 2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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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물질적 도움은 주지 못하지만
그곳의 르네상스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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