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뜸한 틈을 이용하여 나는 9단지 야채 아줌마에게 달려갔다. 무릎관절이 아파서 장사를 오래 못하게 생겼다고 푸념하던 야채 아줌마가 오늘도 그 동네 주민들에게 물건을 파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웬만한 가게 수준보다 물건이 더 풍성하고 다양하다. 대저 살아 있는 뭇 생명들에게 먹는 즐거움을 빼면 중요한 게 무엇이 있을까.
노각(늙은 오이) 두 개와 아삭이 고추 호박잎 가지 등을 사 가지고 허등지둥 7단지로 왔다. 비가 양산을 후두둑 때리며 거칠게 쏟아진다. 오늘이 음력으로 유월 초하루이니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될 모양인가, 비오는 뽄새가 여간 사나운 게 아니다.
집에 와서 보니 이게 도시락 반찬으로서 과히 유용할 것 같지가 않다. 채소반찬은 만드는데 손이 많이 가고 해놓아도 먹을만 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건어물 종류로 도시락 반찬을 장만하는 것도 장마철에 좀 그렇다. 우선 비린내다. 오징어는 오징어 냄새, 꼴뚜기는 꼴뚜기 냄새. 그러니 튀기거나 구운 생선을 가져갈 수도 없지 않은가. 멸치볶음이나 오이지무침 콩자반은 어린 시절 질리게 먹었으니 아들은 싫어할 게 뻔하다.
얼마전 며늘아이는 나에게 더덕구이를 좀 해다 달라고 하였다. 우리집에 오면 늘 더덕구이를 먹었던 기억을 했던 것 같다. 더덕구이는 나의 어머니께서 자주 맛나게 요리해 주시던 주 메뉴였고 어릴 때 우리집 마당에는 더덕 넝쿨이 기세좋게 뻗어올라가 지붕을 덮어버릴 정도로 무성했다. 그래선지 나 역시 더덕구이를 노상 즐겨 먹었다. 그런데 항암주사를 맞고부터 오히려 며늘아이 건강은 급속도로 하강, 더덕구이고 무엇이고간에 모든 음식에 대한 관심은 고사하고 생과 사가 경각에 달린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숫제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는 며늘 아이 입장을 고려하면 이런 도시락 반찬 걱정 자체가 가소롭고 송구하다. 너무나 엄청난 고통을 못 견뎌, 삶을 체념한 듯 근래는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는다. 링거에만 의존하는 며늘아이 병세가 하루하루 살얼음을 딛는 기분이다 . 아침에 눈을 뜨면 삶의 시작이요,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죽는 연습이라고 하지만 생과 사에 대한 것은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신중한 명제가 아닌가.
다행이랄까. 소설가 친구가 의사 동생에게서 전해들은 자연 치유와 의학 정보대로 시행해보니 반짝 회복의 기미가 찾아왔다. 더하여 제수씨를 위해 미국에서 큰 아들이 보낸 신기한 약물?을 몇 번 먹이자 며늘아이는 놀라운 차도를 보였다. 기적은 준비하는 자에게 찾아온다고 하던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인명은 재천이라 고 하고 하늘나라에서 해야 할 몫이 있어 일찍 불러가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승을 떠난다고 곧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티베트의 死者의 書>에서 읽은대로 분명 죽음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이론을 인정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살고 있는 자들의 임무라면 묵묵히 아픈 영혼을 돌보고 치유를 돕는 일일 것이다.
나는 매일이다시피 국립암센터로 도시락 배달을 간다. 직장에 휴직계를 제출하고 제 처를 간병하고자하는 그 마음씨가 갸륵하여 나는 소설이고 수필이고 다 미루었다. 오로지 도시락 하나 잘 싸보자. 그래야만 한다. 아들마저 쓰러지면 누가 저렇듯 애틋하고 살뜰하게 며느리를 돌볼 것인가.
나는 좌절하지 않고 도시락을 쌀 것이다 . 그게 채소 반찬이든 후랭크 소시지건 무엇이건 거기에 특별한 마음 하나. 즉 정성을 듬뿍 퍼담아 아들에게 전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혹여라도 묘책이 떠오를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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