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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遭遇 



이진화 

 

 며칠 간 풍랑으로 배가 끊어졌다. 왜 하필 절해고도였을까. 육지에도 갈 수 있는 곳이 널려 있는데 크게 마음먹고 찾아간 곳이 마라도다. 삼 주간의 자발적 유배에서 무엇을 찾을지 미리 정한 것은 없었지만 낯설고 신비스런 섬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떠났다. 반평생 익숙하게 살아온 생활 방식이 모두 쓸모가 없어지는 낙도에서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마라도의 자연은 오감이 무디어진 도시인에게 거친 파도, 숨 막히는 바람, 자욱한 안개를 통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섬은 참 적막했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불과 한 시간이면 제자리에 돌아오는 작은 땅 한 줌, 없는 것이 흔하고 불가능한 것도 많은 섬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동선을 따라 시간 여행을 해보았다. 예전에는 제주도만 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유배의 땅이었다. 거기서 또 남으로 망망대해를 지나 외롭게 떠있는 최남단의 막내 마라도는 유배지의 유배지였을 것이다. 동력이 없던 시절에는 한 나절 노를 젓거나 돛을 부려야 닿을 수 있는 섬이었을 테고, 더 넓은 세상에서 이탈한 누군가가 나무둥치나 뗏목을 붙잡고 우연히 닿은 곳인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섬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기도 어려운 환경이다. 사람의 키를 넘는 나무가 거의 없고, 무언가 심고 가꾸기가 어렵게 황량한 땅이다 보니 그나마 익숙한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바다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어찌어찌하여 한 여인이 들어왔을 테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바다 속에 들어가 해물을 따며 물질을 시작했으리라. 섬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큰 섬이나 바다로 나간 남정네를 기다리던 여인들이 목 놓아 통곡하다 눈물을 닦으며 다시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섬마을 올레 길을 걷노라니 한 집에 대여섯 명의 할망(제주도 말로 할머니)들이 평상에 둘러앉았고 마당 한 쪽 빨랫줄에는 검은 잠수복이 널려있었다. 칠순이나 된 분들도 여전히 물질을 하는 현역 해녀들이었다. 나무조차 자라지 못하는 거친 땅에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녀들의 억센 손마디도 어린 시절에는 꽃가지처럼 부드러웠을 터, 단단한 나무보다 여린 꽃과 풀이 그렇게 강하고 끈질기게 살아남는다는 것이 신비롭다. 

  마라도에 머물면서 스무 날 동안 매일 파도를 바라보았다. 새벽마다 잠이 깨면 창문을 열고 파도의 표정을 살폈다. 첫날은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집집마다 야트막한 담 너머로 집안이 다 들여다보이는데 성글게 쌓은 돌담은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지만 어떤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바람에게 길을 열어주는 빈 공간의 힘이다.

  창작 집필실 앞 바지선 선착장에서 아이들은 작은 게를 잡으며 깔깔댔고, 관광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 아가씨에게 나도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사진이 찍히는 순간 갑자기 너울 같은 파도가 덮쳐왔고 손쓸 겨를도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거대한 손으로 얻어맞고 이어서 바다로 확 빨려 들어가는 느낌…. 일어나 보니 온몸이 긁혀 상처가 나고 아끼던 하이브리드 카메라는 바닷물에 잠겼다. 그 날은 내 인생에 부정맥과 같이 예기치 않은 너울 파도가 들이닥친 날이었다.

  발목이 아파 움직일 수가 없다고 보건소 소장이 직접 왕진을 와서 주사를 놓고 약을 지어 주었다. 다음날부터 통증이 가시고 차도가 있었지만 여러 날 동안 바다를 바라보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서지를 못했다. 다시 파도를 보러 나간 것은 며칠 후의 일이다. 매일 걷는 거리를 조금씩 늘리며 다가간 바닷가에는 더 높고 강한 파도가 연일 뒤척이고 있었다. 잔잔해 보인다고 해서 무방비 상태로 다가갔다가는 예기치 못한 파도에 휩쓸리는 곳이 바다고 세상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배운 선착장의 풍경은 무심하고 평화로웠다. 

  섬사람들에게는 바로 그런 바다가 그들의 세상이고 일터다. 나무 한 그루 뿌리 내리기 힘든 땅에 살면서 파도를 헤치고 물질을 하는 해녀들, 풍랑 속에서도 꿋꿋하게 서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주민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그 모습을 가슴에 담았다. 도심의 숲에 숨어 소유와 소비에 급급한 문명인으로 살다가 혹시 두려움에 직면하거나 용기가 필요할 때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담대한 자연인을 깨우기 위해서다. 

  비록 작지만 강인한 한 점의 섬, 마라도에는 선인장 꽃이 끊임없이 피어나고 백년초 열매가 농밀하게 영글어 간다. 시시각각 다른 빛깔로 반짝이는 바다 위로 노을이 내린다.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 훌쩍 떠나고 싶은 꿈을 품고 있다면 용기를 내어 며칠간 외딴 섬에 가볼 일이다. 섬에 가면 대중 속에서 고독한 섬으로 살던 내 안의 나와 번개처럼 조우를 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내가 새로운 세상으로 난 문을 열지도 모른다. 

 

- 한국산문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