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그리움
- 고샅 -
최원현
nulsaem@hanmail.net
가슴이 콩당거리기 시작했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내딛는 걸음이 점점 무거워 진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 흙돌담만 돌아나가면 이제 집이다. 내 몸을 가려주던 모든 것이 사라진 채 벌써부터 집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실 할아버지와 마주칠 것을 생각만 해도 몸이 돌처럼 굳는 것 같다. 그 위로 떨어질 할아버지의 호통, 어쩌면 손에 든 회초리가 먼저 내 등에 떨어질 지도 모른다.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한 날의 그 두렵고 떨리던 기억이 어찌 이리도 강하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었는데 그게 들통 났던 것 같다. 속이거나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도 용서치 않으시던 할아버지셨으니 내가 그처럼 벌벌 떨었던 것은 필시 할아버지의 성정을 잘 아는 내가 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지레 겁을 먹었을 것이다. 그 날 집으로 향하는 고샅길은 어찌 그리도 짧았는지 모른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마을 정자나무와 맨 먼저 만난다. 신성시 하는 나무가 아니라 우리들 놀이터다. 나무에 오르기도 하고 명절 때면 줄을 매어 그네를 타기도 했다. 여름엔 멍석을 깔고 그늘을 즐겼고 가을엔 거두어들인 곡식들의 타작마당이었으며 겨울에도 나무 밑엔 눈이 쌓이지 않아 우리의 놀이터였다. 사방이 틔어 겨울엔 바람도 차건만 그럼에도 그곳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나무 밑엔 꼭 누군가가 있었다. 그 정자나무를 지나면 탱자 울타리가 나오고 그걸 지나면 돌담이 나오고 거길 지나면 마을 우물이 나왔다. 우리 집도 우물이 없었기에 내가 할머니 대신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가기도 했다. 우물에서 ㄴ자로 꺾어져 친구네 집 담장과 다른 탱자 울의 골목을 빠져나가면 흙돌담을 마지막으로 우리 집으로 향하는 작은 길이 나왔다.
차를 대고 곧바로 갈 수 있는 길로 가지 않는다고 아내는 투덜댔다. 그러나 내겐 생각이 있었다. 조금 걷더라도 어린 날 다니던 그 고샅길을 지나보고 싶어서였다. 아마 내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내가 알던 어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고 내 또래들도 거의 다 세상을 떠났단다. 한 둘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사는 대부분은 내가 떠난 후 태어난 그들 자녀일 것이다. 떠난 지 어언 45년이다. 고샅을 지나며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근이네 집 앞을 지나는데 젊은 남자가 축사(畜舍)를 손보고 있다. 아마 근이 아들인 것 같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생김생김이 근이를 빼 담았다. 아는 체를 해 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냥 이렇게 조용히 지나가 보자고 한 것이 아녔던가. 마을은 정적이 감돌만큼 고요하다. 한낮인데도 이러니 밤이면 얼마나 더할까. 문득 내가 알 만한 사람도 몇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고향을 지키는 건 아무래도 젊은이들이 아닐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동무 중 누가 있지 않을까.
고샅은 변하지 않았지만 마을 앞길 옆길이 모두 넓은 찻길로 바뀌었고 집들도 새로 짓거나 단장한 집이 여럿이다. 꽤 큰 창고도 둘이나 들어서 있는 걸로 봐서 마을 공동작업을 할 거리도 있나보다.
도시의 골목과 달리 고샅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면서도 공동의 장소였다. 오롯이 혼자만을 지켜주면서도 담 너머로 고개만 내밀면 소통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있으나마나 허술하기 그지없는 문은 영역의 표시일 뿐 출입을 막는 역할이 아니었다. 키우는 닭이나 오리가 나가는 것을 막는 구실이기에 살짝 밀어도 열리고 그것도 없으면 닫아놓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니 고샅은 서로의 공간을 이어주는 공동공간인 셈이었다. 그런데 아내와 함께 45년 전의 고샅에 들어서보니 우물은 존재감을 잃었고 사립문들은 철문으로 바뀌었다. 담도 높아졌고 훤히 내다보이던 집안이 깨금발을 해도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고샅길은 있으나 옛 고샅은 아니었다. 내밀한 것들까지도 비밀이 없던 공간은 이젠 비밀이 가득이다. 그러니 설혹 옛 동무가 살고 있다고 해도 그 또한 내가 알던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
고샅 끝에 서서 우리 집이 있던 곳을 바라본다. 모두 밭이 되어 콩이 자라고 있다. 저만큼이 우리 집이 있던 자리일 텐데 속으로 가늠하며 무언가 확인될만한 것이 없을까 찾고 있는데 아내가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가 장독대 자리라고 한다. 내 눈이 따라가 머문 곳, 콩들 속에서 유난히 키가 큰 것이 자라고 있었다. 모시풀이었다. 아내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독대 가로 할머니는 모시풀을 심어놓았었다. 십수년 전 아내와 왔을 때 나는 콩밭 속을 뒤져 모시풀을 찾아냈었고 두 뿌리를 캐다 아파트 옥상 밭에다 심어 기르기도 했었다. 모시잎은 얼핏 보면 콩잎과 비슷하다. 그러나 훨씬 잎이 크고 키도 크다. 그래서 아내는 단번에 그곳을 알아보았고 나도 소중한 것을 발견한 기쁨으로 한껏 흥분했다. 뽑아내 버리지 않고 놔두는 밭주인이 고마웠다. 내 이런 마음을 알고 저렇게 살려주었을까. 찾아가 인사라도 하고 싶어진다.
고샅을 빠져나와 우리 집에 이르던 길은 더 좁아졌다. 밭에 갈 때나 쓰는 길일 뿐이니 통행이 없어서일 것이다. 사람이 다녀야 길이 되는데 이 길조차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알던 이들이 없어져 버린 고향마을에서 반쯤 없어져 버린 길을 따라 나오다 모시풀을 바라본다. 순간 할머니가 장독대에서 환하게 웃으시며 서있다. “할머니!” 나도 모르게 할머니를 불렀다. 아내가 내 몸을 흔든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조금 전에 지나왔던 고샅이 추억과 그리움으로 가슴에 안겨온다. 그러나 선뜻 다시 그 길로 접어들 수가 없다. 변해가는 삶의 현장, 이 길을 다시는 못 올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이 고샅도 그리고 내 그리움의 모시풀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내가 카메라를 꺼내자 아내가 그냥 가잖다. 추억도 그리움도 가슴속에만 간직하는 게 낫다는 것인가. 설마 이런 걸 찍어 뭐하려느냐는 것은 아니겠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정자나무에 이르니 지고 있는 저녁 햇살이 나무 끝에 걸려있다. 거기 누군가 날리다 놓친 것일까. 꼬리 연 하나가 걸려 저녁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다. 잘 왔다는 것일까, 잘 가라는 것일까. 나도 같이 손을 흔들어 준다.
최원현
《한국수필》에 수필, 《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 등 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