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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1-12-12 20:58
조회 :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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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이상하다. 집이 몸살을 앓고 벽이 울음 운다. 우적우적 맷돌 가는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 진행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경기도 북부 작은 동네에 살고 있는 나는 한 밤중이나 이른 새벽녘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에 잠을 깨곤 한다. 수초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면 물고기가 가까이 온 것이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새가 날아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땅의 속살이 신음하면 그것의 표면위로 무엇인가 지나갈 때이다. 아하, 군부대가 야음을 뚫고 이동하는 것이구나.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독일기갑사단이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며 벨기에 접경지역에 있는 쇠뿔 모양의 삼림지대인 '아르덴'으로 향한다. 추위에 언 병사들의 얼굴은 푸르뎅뎅하다. 탱크부대가 진격을 멈춘다. 눈발이 흩날리고 자작나무가 귀신울음 소리를 낸다. 탱크 뒤에 도열한 병사들이 입술을 들썩여 신입 전차병 시절 배운 군가를 부른다. 서치라이트 푸른 불빛이 구름에 반사돼 천지를 밝힌다. 철십자훈장을 목에 건 지휘 장교가 채찍을 들어 전방을 가리킨다.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수목이 잘려나가며 구덩이가 파인다.
아마 그렇진 않을 것이다. 부대는 야음을 타 이동 중인 모양이다. 전곡이나 포천 등지에서 포격 훈련을 하다 휴전선에서 가까운 소읍을 가로 질러 한탄강의 물살을 헤집고 고개를 넘어 진창을 지나온 것이리라. 나 또한 그 옛날 그 길을 다녔다.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로 위장하고 숯 검댕 칠을 한 정한(精悍)한 병사들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비껴 쓴 보안경에는 먼지 때가 가득하고 천지 사방을 휘 번뜩이는 눈초리는 태평양을 응시하는 정복자 '코르테스'처럼 날카롭다. 목에 두른 머플러의 붉은 색이 속곳처럼 선연하다.
탱크의 캐터필러 굉음(轟音)은 잠자는 수컷의 본능을 일깨운다. 심혼을 뒤흔드는 맹수의 천둥 같은 포효(咆哮). 자칫 방심하면 내상(內傷)을 입는다. 누군가는 노래했다. 꽃들은 어디로 갔고, 소녀들은 어디로 갔으며, 세상의 남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고. 어느 여류시인도 한탄했다. 수컷이 그립다고. 그렇다. 이 시대는 수컷 부재의 시대다. 자태를 뽐내며 잿빛 도심의 물길을 요리 조리 헤엄치는 잔챙이 물고기 떼의 몸체에서 허구의 비늘이 반짝인다. 시인이 설마 꽃미남 아이돌의 빨래판 복근을 운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위선과 이기주의, 교양의 탈을 쓴 비열함이 판치는 세태를 서러워하고 사라져가는 남성성과 수컷의 고유한 가치를 흠모하는 것이리라.
남자인 나도 때로 수컷이 그립다. 보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런 남자가 그립다. 그가 얼음 바다를 철썩이는 고래의 등허리에 작살을 던지는 극지(極地)의 어부가 아니어도, 철 로프를 타고 용광로 속으로 내려가는 미래로부터 온 전사(戰士)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없는 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남자라면. 또한 가까운 사람을 가깝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지 않은 남자라면. 아, 그가 용기가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알고 자비를 베푸는 남자거나, 때로 나무 등걸을 부여잡은 채 눈물을 흩뿌리다 돌아서는 인간적인 사내라면…….
간혹 밤중에 산속을 걷는 상상을 한다. 밤바람에 소름이 돋는다. 물소리, 바람소리, 깨어 있는 동물의 울음소리. 나무와 숲이 서걱거리며 시위하고 이 모든 것이 기괴한 화음을 이룬다. 언뜻 길을 잃어 멧돼지와 맞닥뜨리고 싶다. 얼굴에 온 몸의 피가 몰려 따끔거리고 수많은 벌레가 기어 다닌다. 나는 눈을 홉떠 산짐승과 대결한다. 성난 산돼지가 발을 굴러 도움닫기를 시작한다. 내가 야생의 맹수를 당해낼 리야 없다. 짐승의 이빨이 상아처럼 창백하다. 나는 옆구리를 받힌 채 허공으로 솟구치며 떨어져 내리는 달의 파편을 보았다. 달의 찬란한 몰락을.
나는 이제 더 이상 잠들지 못한다. 잠자는 가슴. 뛰지 않은 피. 정제되고 복제된 나날들. 남루하거나 공허한 현실. 밤꽃 냄새 나는 비열한 거리. 휴지조각, 바나나 껍질, 토사물, 짓이겨진 꽃잎……. 한 잔 술로 달래는 일상의 거죽위에 허섭스레기들이 널려 있다. 습자 종이로 만들어진 일력을 찢어 넘기며 지하철 입구로 시작하여 지하철 출구로 끝나는 하루를 가늠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내일. 나는 언제든 실종되고 싶다. 시간과 또 다른 시간이 어긋나 생긴 조악한 틈새로 사라지고 싶다.
벽을 타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짙어진다. 탱크의 포신이 목표물을 찾아 스르르 회전한다. 죽어가는 소의 눈을 닮은 검은 구멍이 포격을 시작한다. 비루한 일상을 정 조준해.
* <<시에 2011년 겨울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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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1-12-13 0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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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선생님 저도 숫컷인데 수컷 구실을 너무 하다가 하마 터면 혼날 뻔 했답니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내가 과연 수컷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때도 있습니다. 수컷 ! 진짜로 수컷다운 수컷이 그리운 시대이기는 합니다. 아무튼 앞으로 수컷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그렇게 한 세상 살아갑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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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12-13 2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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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부럽습니다. 전 요새 좀 비실비실합니다. ^^
날씨 탓으로 돌릴 수도 없고, 연이은 송년회에 참석해 과음한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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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1-12-16 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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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멋있어!
이런 맛으로 현실 속의 모든 환난 고통을 잘 견디고 있는지도.
소설처럼 시처럼 두루 다 멋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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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12-16 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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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花井) 사시는 변영희 선생님께 오랜 만에 인사드립니다.
참, 이 글의 원 제목은 <행신동 탱크> 였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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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1-12-17 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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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 튀는 글이라고 할까요?
어쩜 요즘 고개숙인 남성들을 대변하는 글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그 힘이 불끈 솟아보입니다. ^^*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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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12-18 1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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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습니다. 제가 고개숙인 남자의 전형이어서요, 최복희 선생님.
위 여류 시인은 '문정희' 선생인데, 소시 때 이웃 여고(진명) 문예반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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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1-12-17 1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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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탱크의 등장으로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한바탕 여행을 한 후에
원위치로 돌아온 김창식 선생님,
아무리 삶이 비루하고 공허해도 부디 실종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없는 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남자',
'가까운 사람을 가깝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지 않은 남자',
'용기가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알고 자비를 베푸는 남자',
'때로 나무 등걸을 부여잡은 채 눈물을 흩뿌리다 돌아서는 인간적인 사내' 를
우리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참 사나이들의 부재에 대해 이처럼 안타까워 하는 작가의 소리가 있기에 그나마 세상은 살만 한 곳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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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12-18 1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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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8 inch '자주포'(탱크와 비슷. 포신이 김) 타고 한탄강 건넜 적 있거든요.
"용기가 있으면서도 자비를 베푸는 남자"를 일컬어 '엘 시드( El Cid)" 라고 부르는데,
그의 국적은 카스티야(스페인) 이고, 본명은 '로드리고 디아스 드 비바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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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1-12-20 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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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승일교와 철원의 포 진지들과 한탄강의 꺽지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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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12-21 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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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순 선생님께서도 그곳에서 군 생활을 하신 것이군요.
저도 그 무렵 법원리, 연천, 용주골 등지를 돌아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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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11-12-18 1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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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숙인 남자들의 포유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그러나 결코 숫컷의 용기는 부드러움에 있지 않을까요. 강인하되 꺽이는 않는 대나무처럼 말입니다. 문장마다 아름다운 시어들이 살아 서꿈틀대고 있는 게 새로운 수필기법의 작품 같아 또 다른 신선함을 느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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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12-18 1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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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숨을 곳이 없다니까요. 박원명화 국장님께 설핏 속내를 들켰습니다.
'퓨전(아방가르드?) 수필'로 써 본 것이어서요. 전 그런 어휘를 좋아하진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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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2-18 10: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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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시 충만하신 선생님, 글재가 다양하여 어디로 튈지모르는 긴장과 호기심 속에 다시 선생님의 글을 접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르지 못한 날씨,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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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12-18 1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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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문 선생님이 마냥 그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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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
12-01-06 1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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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역시 김창식 선생이시군요. 하하하. 그런 변화 아주 좋습니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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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2-01-14 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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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법원리 자주포(원래 제목은 野鳥)'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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