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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동사



이진화



 올해 연초에는 행복하기를 기원한다는 메시지와 행복해지고 싶다는 편지를 유난히 많이 받았다. 정말 누군가 행복하기를 빌어주고 행복해지기를 원한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이란 것이 무게를 달거나 두부처럼 잘라서 사고팔고 주고받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닌 것은 분명하건만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이 완제품인양 갖고 싶어 한다.

 지난 주간 한 리더 모임에서 최근 일주일간 본인이 경험한 가장 가슴 설레는 경험이나 행복한 순간을 나누자는 제안을 받았다. 사실 며칠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폭설과 혹한으로 거의가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길이 미끄러워서 넘어지고 차가 밀려서 출퇴근하기가 고역인데다, 택배는 밀리고 수도관 동파가 줄을 잇는데 가슴 설레고 기쁜 일을 찾아 나누자고 하니 억지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 천재지변 속에도 가슴 설레는 행복이 있었다. 그곳에 모인 열댓 명의 사람들은 저마다 한 주간 동안 가장 행복했던 일들을 하나씩 내놓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일들을 말하는 동안 행복하다는 느낌이 점점 커졌다. 방 안에는 훈기가 돌고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에게도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평생 처음 보는 폭설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날, 모처럼 주어진 시간은 크나큰 여백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백지를 주며 마음대로 꾸며보라고 할 때의 느낌이랄까, 넓은 벌판을 달리다 차가 고장 나서 길 한 가운데 서있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외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넉넉하게 주어진 시간, 그 여백에 기대어 여유를 누려보기로 했다.

 우선 대추를 듬뿍 넣고 대추차를 끓였다. 집안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퍼졌다. 컴퓨터에 걸어놓고 쓰고 있던 글 한 편을 완성하고, 평소에 듣고 싶었던 음악을 크게 틀었다. 공동주택이라 밤에는 음악을 듣고 싶어도 크게 틀어놓을 수가 없었다. 하늘 창에는 햇솜 같은 눈이 두툼하게 쌓였고, 가끔 먹이를 찾는 산새들의 날개짓 소리가 들렸다. 깊은 산에서 사는 산토끼나 고라니들도 우왕좌왕 하겠구나.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는 일이 없고 닥친 위험이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동물들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사람들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을 미리 당겨 와서 걱정을 키우는데 그들은 어떤 고통 앞에서도 겸허하다. 결코 재난을 확대 해석하거나 불행이라 부르지 않는다. 주어진 생(生)의 명(命)을 받들어 이루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을 뿐이다.

 평소에 지나쳤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늘 피곤한 자신에게 좋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여름에 샤워할 때나 쓰는 다락방의 욕조에 거품목욕제를 풀고 북해도의 노천 온천처럼 호사를 누려보기로 했다. 긴장했던 근육이 부드러워지고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꽉 짜여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속을 끓이던 하루가 순식간에 행복한 날로 바뀌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 유무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먼 곳에 사는 친구와 한참 통화를 했다. 평소에도 자주 보지 못했는데 모처럼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폭설과 함께 일어난 일련의 예기치 않은 일들로 마음속에 태풍이 휘몰아쳤다고 했다. 그 태풍이 있고 나서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물어보았다. 친구는 무엇이 중요한 지를 깊이 생각했고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도 행복한 일 중 하나가 아닐까.

 날씨는 영상으로 풀리고 하늘빛이 침착한 날이다. 우리집 반려견 코코가 오디오 스피커 앞에 엎드려있다. 신기하게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편안해 한다. 얼마 전 많이 아파서 고생을 했는데 이제는 병들었던 몸에 평화가 찾아왔다. 눈비가 오거나 천둥번개가 치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코코도 지금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격렬한 고통에서 벗어나 더 바랄 것이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을 보며 내가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이 드는 지도 모른다. 코코도 주어진 것을 누릴 줄은 안다. 하지만 무엇인가 고심해서 찾거나 불가능한 것을 꿈꾸지는 않는다. 그래서 행복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서 누리는 능력, 또는 꿈을 끌어 당겨서 누리는 능력이라고 했던가.

 다시 한파와 눈 소식이 있다. 앞으로는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미지의 날에도 마음의 다락방에서 내 안의 나와 조우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또한 행복은 물건의 이름이나 상품과 같이 단순한 명사가 아니고 역동적인 동사를 품은 D.I.Y.( Do-It-Yourself)라는 비밀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다. 이제부터 나의 행복은 신명나게 움직이는 동사(動詞)이고  불가능한 미래를 꿈꾸며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발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