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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 심각한 양상을 띤 것은 아닌데 마음씨 너그러운 문우가 나를 캐나다로 오라고 진지하게 권했다. 한 겨울이어서 눈 빼놓고 별 볼것은 없지만 눈경치가 무척 볼만하다며.
그 마을 자체가  사시사철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이니 속히 용단을 내리라고 촉구했다. 여기저기 발길 닿는대로 구경도 하고 글 소재도 건지고 일단 비행기로 한 번 날아보면 기분이 새로워 질거란다.
고마웠다. 떠나고 싶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그 나라에 가서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머물고 싶었다. 경치도 경치지만 그녀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데에 큰 기쁨이 있을 것 같았다.

K교수님이 전화하셨다. 죽은 내 남동생보다 훨씬 저 아래 년배이지만 불교에 달통한 분이어서인지 나는 늘 그 분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매사에 신뢰를 보냈던 분이었다. 겨울방학을 맞이해서 중국, 대만 등지로 학술기행을 떠난다는. 재학시절  그와 비슷한 여행에 동참했던 누구누구 이름을 거론하시면서 이번 기회에 모두 만날 수 있다고 하셨다. 신라시대 이후 중국에  공부하느라 머물거나 다녀간 한국스님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뜻깊은  여행이었다.

가고 싶었다. 여행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다. 가지 않을 이유는 다른 게 없다. 지난 겨울부터 앓고 있는 마음의 병? 이외에 나는 그 정도의 스케쥴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마음이다.
발목을 잡는 그 무엇은 결국 내 우울한 마음에 연유한다. 지각인 게 분명한 나의 일련의 작업, 십년 공부수행이 결실 즈음해서 지연사태를 빚은 것이 가장 방해받는 요소요, 걸림돌이다.
 
끈끈이 주걱에 발목을 잡혀 옴싹달싹 못하는 날벌레 형국이 바로 현재의 나이다. 항시 입술이 마르도록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이라고 격찬하여 마지 않는 구례 섬진강, 화개 악양 그리고 영맑은 스님이 상주하고 계시는 정서리 골짜기에 언제고 갈 수 있는데도, 원한다면 자운영꽃이 온들판에 만개할 때까지 내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며 글을 쓰던 공부를 혹은 기도를 할 수도 있는데 지금의 나는  굵은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바 되었다.
발목 묶인 사람이 뭐가 즐겁단 말인가. 어디를 간단 말인가. 캐나다의 문우가, K교수님의 여행 제의가  깊은 겨울의 희소식이 될 수 없는 나만의 사정, 인생 지각생의 넉두리가  애닲다.

먼 데든 가까운 데든 일절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안타까움. 행여 길 나섰다가도 뉘우쳐 되돌아오기 일쑤인 나는 그나마 낙오가 아닌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인가. 쉬임없이 시간은 흐르고 좌정은 안되는 고약한 우울 초기증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큰 눈 돌려 지진으로 수 천의 건물이 파괴되고 수십만의 인명피해를 입은 우주적 재난에 봉착한 중미의 아이티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또 지구의 재앙에 대한 영화 <2012> 를 다시 한 번 보면서 내 상심과 번뇌를 다스려보면 어떨까. 이럴 줄 예상이라도 한 듯 아들은  출국하기 전 <2012>를 함께 보러가자고 제안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든다.

멀리 넓게 바라보는 훈련을 쌓아가자고 다짐한다. 지각생에게도 아직 여유는 남아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