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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변영희 |
날짜 : 09-12-04 18:23
조회 :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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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는 기회가 주어졌다. 경주였다. 보문단지 주변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철이 아니어도 경주라면 언제라도 가고 싶던 곳이다.
나만의 추억이 서린 곳. 여고 시절 수학여행에 빠지고 스물셋의 가을 나는 홀로 포항을 거쳐 경주에 갔다. 친구들과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것이 마음에 맺혔던지 나는 경주로 여행을 가서 안압지 천마총 포석정 등지를 돌아보는 가운데 마침 멋진 한 사람 육군사관생도를 만나게 되었다. 각자의 사정으로 오래 사귀지는 못했으나 여태도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수학여행에 빠진 우리들 몇은 C 대학교의 무슨 행사에 참가하였다. 물론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친구들보다 재미는 별로 없었지만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다고 억지로라도 자부해야 한다. 나는 수학여행은 커녕 대학입시를 위한 과외수업도 받을 수 없었고 솔직히 월사금도 밀려 교장실 청소를 맡아놓고 하던 때였다.
C시에 살고 있는 것은 우리 가족 중에 오로지 나 하나 뿐이었으므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혼자 해결해야만 되는 사정이었다. 물론 서울에 부모님이 계시지만 일일이 학교 행사 등을 말씀드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때 C시에서 세번 째 손가락안에 드는 부자집 맏며느리로 시집간 큰언니가 어느날 홀연히 우리학교를 방문했다. 큰언니는 그 당시 유행하던 양단인지 공단 모본단 호박단인지 모르지만 번쩍번쩍 빛나는 원색의 비단한복을 떨쳐입고 와서 은근히 내 기를 죽이던 교장실 청소를 모면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영어과목을 맡고 있는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학부모 대행을 단단히 하고 간 모양으로 나는 영어시간마다 읽거나 해석하는 일로 호명되어 영어 성적이 쑥 쑥 올라갔다.당시 큰언니는 부자였고 C시가 알아주는 미인이었으니 교장선생님도 담임선생님도 무조건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래저래 나는 내 언니가 부러웠다. 언니가 입은 고급 비단옷은 물론 남들이 선망하는 예쁜 용모,게다가 그 시댁이 C시의 은행에 돈이 세 번째로 많은 집이라는 게 놀라웠다. 언니는 이를테면 모범적인 주부 즉 현모양처로서 손색이 없었는데 그때 이미 나는 이다음에 결혼하게 되면 언니처럼 현모양처가 되어야지 하고 서투른 꿈을 꾸었을 가능성이 짙다.
언니는 눈부신 처녀적 경력을 다 일소하고 산드라디를 닮은 요정같은 딸과 눈이 서글서글한 우량아 아들을 등에 업고 걸리고 시장보아다 요리하고, 아침저녁 뜨락 쓸고 화초기르고 살림재미가 쏠쏠한 모양으로 우리 어머니는 언니가 너무 행복하여 깨가 말로 쏟아진다고 평가하였다. 아마도 열여덟의 나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나 싶은 것이 나의 주부근성, 아니 부엌데기 근성은 그로하여 공고해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그래서 토요나 일요일이면 좋을 것을 엿장수 맘대로 목요일 한나절 어중간한 시간대에 괴산에서 절임배추가 온 것인가. 착실한 주부를 위하여서?
까짓 절임배추가 택배로 와도 하루 정도 묵혀서 뭐 안될 게 있는냐는 거다. 김장김치야 사돈댁이 해마다 넉넉한 분량을 보내주거늘 무슨 정성이 뻗쳤다고 문우들이 경주 가자 하는데, 돌아올 때는 봉하마을에 들려 부엉이바위도 보고 오자 권하는데 김치나 담고 앉았으니 혹 나는 바보과科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누구 불러 엄마"
일이 밀려 엄마를 도울 수 없는 딸애가 미안한 듯 말하면서 토요일까지 견뎌보라는 걸 갓김치. 깍뚜기. 동치미. 포기김치 종류도 다양하게 왼종일 마늘 생강 고추가루 젓갈냄새 두루 피우며 뭣에 씌인듯 열중했단 말인가.
" 무 세개 사다가 깍뚜기만 담았어. 번거롭게 이거저거 하지말고 그대도 깍뚜기만 담아"
엊그제 나에게 전화한 선배님도 틀림없이 지금쯤 경주 여행에 동참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런 기회 왜 활용못해.작가는 그저 발로 뛰어야 해.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멀리 나가서 뭐든 얻고 배워와야지 밤낮 살림만 붙들고 씨름할 거야? 그 목소리가 선명하다.
김치 잘 담아서 대체 누구에게 감사장 받을 일 있는 것인가.그도 저도 아니라면 굳세어라 금순이 시대 즉 "바람찬 흥남부두" 의 꽁꽁 언 겨울 피난살이를 잊지 못해서인가. 저무도록 김치 담고 공연히 마음 스산하다. 경주 여행을 떠나지 못한 이유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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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09-12-05 0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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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경주에 가서 태종대, 석굴암, 토함산과 남산을 둘러 보고 온 기억이 납니다.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고 싶어 다시 한 번 가볼 생각입니다.
경주역에서 지갑을 잃어서 서울을 못간다고 등산복에 등산화 신고 육사 출신이라고 나를 속에 그 귀중한 내 용돈을 차비로 앗아간 그 노인 사기꾼도 만나 술 한 잔 함께 하고 오고 싶어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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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09-12-05 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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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을 완벽하게 혼자만의 노력으로 (계획 재료구입 다듬고 씻고 버무리고 마무리 등의 모든 공정) 해낸 것 유사이래 처음. 김치통을 쌓아놓고 사춘기시절 흠모하던 첫애인 쳐다보듯 흡족 뿌듯.
선생님 謝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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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09-12-06 2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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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금순아 한 번 불러봐야겠네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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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09-12-07 1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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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가고 길을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왔다.
일가친척 없는몸이 지금은 무엇을하나
이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라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땅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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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12-07 0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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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김장은 중요한 겨울양식이지요.
저는 금년에도 친척들의 신세를 졌습니다.
작년에는 형수가 담궈다 주더니 올해는 여동생이
넉넉하게 가져다 주었지요.
피천득선생은 여자가 김장 서른번 담그면 다 늙는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이제 처음으로 한번 담궜드니
늙으실려면 당당 멀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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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09-12-07 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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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 김장을 담근 게 아니구요 누구의 도움 전혀 안받고 혼자서 김장한 건 처음이랍니다. 우리 친구들 평소에도 정성껏 김치 담아놓은 다음 식구들이 다 잘 때 김치담근 걸 다시 한 번 열어보곤 한다는데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라 그런가 봅니다.
솜씨 실력 체력 테스트하듯 완벽한 혼자만의 작업 종료. 어쩌다 그렇게 되었어요.그래서 오늘아침 일찍 병원가는데 "김치 안담으셨으면 제가 퍼다 드릴게요" 전에 저가 수술했을 때 우리집에 김치통 실어온 집사님이 전화주셨기에 두루두루 나누어먹는 재미와 인정을 생각하고 그랬더니
"아휴! 변영희씨 건강하구나" 그 말씀에는 차마 병원간단 말 못하고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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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09-12-10 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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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과 맞바꿔 정성껏 담그신 깍두기이니 아마도
먹기조차 아까운 명품일 듯합니다.
그래도 깍두기 김치 담그시고난 선생님의 안색은
'맑음' 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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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09-12-10 1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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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누구세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깍뚜기좀 퍼다 드릴까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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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09-12-10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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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에서 김치, 깍뚜기, 동치미, 총각김치, 부추김치, 청경채 겉저리 같은 일은 모두가 제 소관이랍니다. 이런 김치류들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담을 수 있는 저만의 레시피도 있지요. 기름기 번지르한 햇쌀밥에 무국 한사발만 마련해 주신다면 무료 원정 출장 봉사도 가능하겠습니다. 후식으로 식혜나 수정과 한모금까지 기대를 한다면 욕심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실는지요. 고향의 계절을 느끼게 하시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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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09-12-11 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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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사는 친구는 한국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한국적으로 살더라고요. 어쩌면 60년대 70년대를 그대로 살고 있는 느낌이었지요. 직장에 다니면서 어떻게 그와 같은 식생활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선생님의 무국과 햇쌀밥 이야기가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지금 우리 주변에 박영보 선생님과 같이 달랑무김치 파김치 종류를 썩 잘 담그는 아저씨? 도 꽤 있어요.본래 요리는 남자몫이 아닌가 싶거든요. 후라이팬이 여간 무거워야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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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09-12-11 2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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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옛날에 그 사관생도와
잘되셨으면 참모총장사모님 한번쯤 해보셧을것 같은데
그보다도 지금 부군이 훨씬 더 훌륭하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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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09-12-12 1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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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말하리라-
근데요 있잖아요.(손녀딸 語法)
요즘은 스물세살 처녀가 알거 다 알지만 당시는 청주 촌뜨기가 첨으로 나홀로 경주여행을 가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몰라 경주시청에서 운영하는 관광센타를 갔어요.거기에 괜찮은 분이 사진사를 소개해 주었고 관광코스를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는데요.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데 난데없이 편지 한 통이 날아온거죠. 광화문 00무슨 다방에서 뵙고 싶다면서. 경주 관광센타의 동생분 즉 육군사관생도가 출현한 사건? 와아! 대한민국의 멋진 싸나이더라고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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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09-12-12 1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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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을 담그시며 마음은 경주에 가 계셨군요.
변선생님답지 않으시네요.
열 일 제치고 여행에 따라나설 분 같은데.ㅎ
그 깎두기 맛 보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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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09-12-12 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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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복희씨!
아니야. 우리가 충청도에서 교육을 잘못 받은 게 틀림없어요.(여고동창회에서도 거론되는 사안임) 해떨어지면 문방구에 연필사러 문밖에도 못나갔어요. 극장에 변장하고 몰래 가는 애들도 더러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추석에 큰언니 옷 얻어입고 <다정도 병이런가> 그거 한 편 본 게 처음이고 마지막.우리집은 좀 유별난 것 같았어요.그리 컸으니 경주 여행보다 김치가 우선아닌가.지금 디게 속상해요. 경주 못간 것 뿐 아니라 얼치기 가정주부 노릇으로 바보로 살아온 그 자체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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