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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작을 위하여                  김자인 (본명 김인자)

 
 마음이 허전하거나 배움의 갈증을 느낄 때면 공부가 하고 싶었다. 물을 주지 않아 소들해진 화분에 물을 주면 생기가 살아나듯 굳어 버린 내 정신의 뿌리에 영양을 주어 자양분을 흡수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들이 길게 뿌리내리자 더 늦기 전에 실행에 옮기고 싶었다.

 4년 전 겨울 아무도 몰래 원서를 내고 입학 준비하면서 혼자 들떠 있다가 합격통지서를 받고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한데 좋아하는 내 감정과는 달리 가족 모두는 시큰둥했다. 남편의 호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등록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학비를 조달해야하는 그이에게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데 갑자기 새벽에 119에 실려가 병원에 입원 하는 바람에 입학 계획이 송두리째 깨지게 되었다. 그동안 멀쩡했던 몸에 갑자기 적신호가 온 것이었다. 신이 있다면 공부하지 말라는 계시인가 싶어 단념할까 고민하다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를 생각했다. “그래, 안 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지, 등록을 해도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병이 낫겠지” 혼자 중얼 거리며 가방 속에 넣어둔 등록금 고지서가 생각나 집에 가는 남편에게 가방 좀 갖다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리고는 등록 마지막 날 아침, 입원실에서 출근하는 남편에게 고지서를 내밀었다. “오늘이 학교 등록 마지막 날인데 어떡하지?” 볼멘소리를 하는 나에게 “몸이 이래가지고 학교는 무슨 학교~?” 좋은 말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곤두막질 쳤다. 간호사가 휠체어를 밀며 검사실로 데려가도 풀기 없는 무명천이 된 나는 종일 의기소침해 있었다. 진즉에 할 걸, 아쉬움과 후회가 교차했지만 병원에 있으면서 병명도 모른 채 검사만 계속 하고 있었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만감이 교차하던 하루가 지나고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퇴근해서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남편은 연락도 없이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며칠을 병원에 와서 잠자고 출근 하는 것도 애가 타는데 학교까지 다니겠다니 속도 상하겠지, 그래서 어딘가에서 술 한 잔 하겠지, 언니가 늘 내게 말했잖아, 사람이 하는 일 억지로는 안 된다고, 운이 따라주어야 하고, 인덕이 있어야 한다고, 아깝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겠다. 아니야, 그래도 난 할 거야,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마음은 혼자서 널을 뛰고 있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 병원에 있어야하는 건지 속상할 뿐이었다.

 그래도 궁금하여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당신 책 타러 교보문고에 와 있어” 그 말 한마디가 왜 그리도 따뜻하게 들려오는지, 그동안 봇물처럼 가둬두었던 미움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진종일 어둡고 편치 않았던 마음에 갑자기 환한 불이 켜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내리고 나는 병실에 앉아 그의 영상을 실루엣으로 쫒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나타난 그는 착한 일을 한 사람처럼 씩 웃었다. 손에는 서점의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퇴근 후에 저녁도 굶고 교보문고에 가서 교재를 받아온 것이었다. 남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사실은 온종일 병원에서 벽을 쌓았다 허물었다가를 반복하며 지냈다. 침상에 누워있으면 천장은 고속버스에 앉아있는 것 같은 속도를 내며 내달리고, 일어나거나 누울 때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앞이 캄캄했다. 어지럼증 때문에 질식할 것만 같은 시간 속에 4일 동안 병명도 모르고 이것저것 검사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그가 내미는 등록금 영수증은 반가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방송대는 내게 희망이고 빛이었다. 학년이 올라 갈수록 재미가 쏠쏠해졌고 활력소가 되었다. 출석수업의 열기에 감동하고, 동아리에 가면 천차만별의 학우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공부하는 시간이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돋보기를 쓰고도 칠판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다들 얼마나 열심이던지 그 열기 속에 촉수하나 담그고 있음이 흐뭇했다. 일인 다역을 해내며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뒤늦게 호강한다 생각하니 놓친 열차를 탄 기분이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부터는 가족들에게 늘 미안했다. 작은 아들이 먼저 결혼해서 다섯 살짜리 손녀딸이 있는데 “ 엄마 내일 태희 좀 봐 줄 수 있어요?” 하면, “ 어떡하니, 나 시험 공부해야 하는데” “에구~ 알았어요” 사부인이 아이를 돌보고 계시지만 외출할 일이 생기면 내가 봐주기도 한다. 하지만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요청을 거절해야했다. 그럴 땐 많이 미안했다.

 지난 해 9월 큰 아들도 장가를 보냈다. “ 어머님, 시험 언제보세요” 밝고 명랑한 큰며느리가 시험 기간에 오지 않으려는 배려임을 잘 알기에 날짜를 알려주면 “ 어머님 공부하시라고 저 일부러 전화 안 드려요. 파이팅 하세요.” 하면서 힘을 실어주었다. 작은 며느리도 “어머님, 또 시험이세요. 성적 잘 나오셨어요? 대단하세요.”하며 내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쉬는 날에도 내 일정에 맞춰야하는 남편도 가끔 투덜대며 강짜를 부리기도 했지만 시험장까지 태워다 주거나 “ 엄마 컴퓨터 잘 되는지 한번 봐 줘라, 후회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 공부해” 하며 텔레비전도 줄이고 은근히 외조 해주었다. 이런 가족들을 생각하면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다.

 가을이면 알곡을 거둬들이고 과일도 풍성하다. 넉넉한 그 열매들이 하루아침에 자라나서 열매 맺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모진 비바람과 태풍을 견뎌내고 이루어낸 결과물이기에 나도 참고 인내한다면 단물나는 과일이 되고 창고에 알곡이 쌓이듯 내 안의 창고가 조금은 풍성해 지지 않을까 싶었다. 늦은 나이에 삶의 빈 공간을 채워줄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하루하루가 귀하고 소중한 시간 앞에 감사할 뿐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맞이하는 시간이나 보내는 시간이 다시 올 수 없기에 공부하는 시간이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어느새 나는 4학년, 기말고사도 끝나고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다. 잠시 어지럼병으로 고생했지만 건강도 바로 회복되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 했을 때는 학교를 마칠 때까지 한 집안의 장손며느리와 아내, 어머니, 할머니 역할에 학생 신분까지 다 잘 해낼 수 있을까가 걱정되었지만, 힘든 고비를 견뎌내고 마무리할 수 있어 뿌듯함이 인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도 얻었고, 시들었던 식물이 수분  빨아들인 것을 생각하면 흐뭇해진다. 동동거리며 여기까지 걸어온 노정의 시간들이 고맙다.

 최고의 자리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살자고 오늘도 나에게 다짐을 한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하여 새해에도 나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할 것이다.

 ( 2013년 방송대신문 신년 특집, 에세이 모집에 채택되어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