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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3-08-19 10:22
조회 : 2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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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바다는 고요하다. 해조음이 꿈결에 듣는 자장가처럼 귀를 간질이고 소라껍질이 뒹구는 모래밭 너머로는 해송(海松)숲이 펼쳐져 있다. 에메랄드 빛 바다에 흰 돛배가 떠가고, 맞닿은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으며, 큰 배는 갈매기를 몰고 더 먼 바다로 나아간다. 조용하고 평온한 바다는 인간의 집단무의식에 각인된 대표적인 바다의 이미지다. 그러나 바다가 매번 그런 것은 아닐 터.
폭풍우 치는 날의 바다. 세상이 처음 열릴 때 그러했을까? 무(無)와 혼돈, 어둠이 뒤섞였다. 하늘이 내려앉고 파도는 치솟아 시야를 가리며 천지사방은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해는 빛을 잃고 떨어진 지 오래고 달과 별은 어둠속으로 숨었다. 뒤엉킨 비바람이 더 큰 회오리를 이루어 바위를 때린다. 광란의 바다 앞에 시인의 넋처럼 서면 무엇이 산 것이오 무엇이 죽은 것이랴? 바다야, 바다야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그러나 울부짖는 바다의 형상 또한 바다의 피부요 겉모습일 뿐.
바다의 은밀한 속살과 장기, 피돌기를 보려면 볕도 들지 않은 어두운 밑바닥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해파리 떼가 공정대처럼 낙하하고 날씬한 뱀장어가 악기의 현(絃)처럼 물길을 흩뜨리는 곳. 자줏빛 물풀이 미친 여자의 서러운 울음처럼 나풀대고 덩치 큰 곰치는 미욱한 새색시처럼 바위 틈 사이로 얼굴을 감춘다. 강철 근육과 지옥의 눈을 가진 대왕문어가 마술보자기처럼 몸집을 오므렸다 펼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노랑 띠를 두른 잔 물고기 떼가 일사분란하게 제식훈련을 펼치는 곳. 그곳에 물길의 본류(本流), 침묵하는 바다의 모습이 있으려니.
바다가 이처럼 여러 모습으로 다가올진대, 인식하는 대상으로서의 뭇 사물이라고 다를 바가 있을까보냐. 무심코 보고 느끼는 사물의 형상 역시 실체가 아니라 한 부분이나 양태일 수도 있다. 실존주의 소설가이자 환상적 리얼리즘의 귀재 카프카라면 바닷가에 늘어선 해송들을 보며 짧은 산문「나무들(Die Baume)」에서처럼 이렇게 읊었으리라.
"우리가 보기에 그것들은 눈 속에 선 나뭇등걸과 같으니까. 겉보기에 그냥 살짝 늘어서 있어 조금만 밀면 밀쳐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멈춘다면 지나치게 상투적이며 전혀 카프카답지 않다. 카프카는 결코 귀납적인 합리주의자가 아니니까. 그는 당연히 진술을 뒤집는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나무들은 땅바닥과 단단하게 결합돼 있으니까."
그래도 카프카적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미진하다. 삶의 모호함과 무근저성(無根底性), 불가해한 세상의 부조리를 되풀이해 증언한 카프카가 아니던가. 그는 늘 그렇듯 다시 한 번 연상을 파괴한다.
"그러나 보아라. 땅바닥과 단단하게 결합돼 있다는 것도 다만 겉보기에 그럴 뿐."
사물은 그대로 인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사물이 그렇게 보인다고 그대로인 것도 아니다.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면적인 시각으로 파악해야 한다. 전과 후, 겉과 속, 좌‧우배면의 맥락을 함께 관찰해야 추론이 가능하다. 때로 사물들의 유사‧상관관계를 따지거나, 순서대로 배열하거나 일부러 흩트리거나, 사물이 작동하는 개념과 원리를 찾아내거나, 대상 속으로 파고들거나, 거리를 두고 객관화 하거나,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 너머의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해도 어느 것이 참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이 궁금하면 누구나 시계를 찾지만 시간의 본질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거리를 둔 대상에 대한 인식만을 문제 삼았을 뿐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 모습을 대함에 치명적인 시야의 결손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간 나는 나의 손, 팔, 가슴, 다리, 발 같은 몸의 일부분만을 보았다. 그러니까 나의 등과 얼굴은 볼 수 없다. 나는 '나의 전체', '전체로서의 나'를 보지 못한다. 기껏해야 사진이나 비디오를 통해 그러려니 추측할 뿐이다. 거울을 보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일상의 나임을 인지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거울 속 모습은 잡을 수 없다. 과학적으로도 좌우가 뒤바뀌어진 허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정작 어떠한 존재인가? 나는 속삭이거나, 다정하게 미소 짓거나,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고요한 바다). 얼굴을 붉히며 부르짖거나, 격한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폭풍우 치는 바다). 때로 우두커니가 되거나, 깊이를 알 수 없는 내면으로 침잠한다(내면의 바다). 도대체 어느 것이 나의 참 얼굴일까? 나는 아주 가끔은 허허롭고, '나로부터 멀리 떠나와 내가 아닌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데(바다 아닌 바다), 그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 일까.
무엇보다 곤혹스러운 것은, 나는 내가 주인인 나의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다 속으로 또다시 들어가 볼 수밖에. 그곳에서 산호초의 찬란한 산란, 돌무지 배경 속으로 감쪽같이 녹아드는 곰치, 형광 띠를 두른 잔챙이 물고기떼의 행진, 메두사의 머리칼 같은 물풀의 흐느낌, 해저의 정밀(精密)과 끌탕처럼 피어오르는 모래먼지[沙塵]를 보았다. 과연 바다 밑의 바다는 보아 오던 바다의 겉 보습이 아닌 전혀 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밑바닥 바다 모습 또한 "땅바닥에 단단하게 결합돼 있는 나무들"처럼 다만 겉보기에 그럴 뿐인지 모른다. 심해 밑바닥 열공(熱孔)으로부터 수증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좌초해 어둠 속 어초(漁礎)군에 기대 있는 선체너머 해저 동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옳거니, 검은 입의 동굴 입구는 미지의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인 것일까? 그 너머에는 무엇이 펼쳐져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그것 또한 전부 다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바다가 그럴진대 천 길 물속보다 깊다는 사람의 마음을 알려면 무엇을 들여다보아야 하는가.
*<에세이스트> 50호(7-8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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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3-08-19 1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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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주제는 결국 마지막 문장, . ' 바다가 그럴진대 천 길 물속보다 깊다는 사람의 마음을 알려면 무엇을 들여다보아야 하는가'.에 담긴듯 합니다. 그렇지요. 무엇이 복잡하고 깊은들 사람의 마음만큼 복잡하고 깊으겠습니까. 전편에 흐르는 글에서 찜통더위에 시달리는 마음을 해소시키는 시원한 쾌감을 맛 보게 됩니다. 바다를 집중적으로 응시하며 글을 풀어 가는 솜씨가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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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08-19 2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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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선생님,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참다운 비평의 행위는 텍스트를 정확히 해독하고, 작가가 미처 놓쳤을지도
모를 부분까지 짚어내어 작가의 지평을 확대해주는 협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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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3-08-20 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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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번에 변산반도 삼박사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바다 구경도 실컷 하고 배도 타보고,
바다에 풍덩 들어가보기도 하고 , 갯다슬기를 잡아다가 끓여 어릴적 고향생각을 하며
먹어보기도 했습니다. 파도타기도 한 번 해 보았구요.
그러나 바다는 우리를 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카프카의 내면의 세계가 다시 한 번더 바다를 생각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창식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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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08-21 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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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군요, 임재문 선생님. 변산반도에서의 3박4일!
부럽습니다. 전 사실 오랜동안 바다를 보지 못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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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3-08-20 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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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에 대한 불안이나 삶의 부조리 따위를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심도 있게 파헤친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카프카.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서 ‘모든 죄악은 초조와 태만함에서 비롯된다’. 바닷가가 그리운 계절, 深沿 풍경이 그림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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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08-21 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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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섭 선생님, 오랜 만에 뵙습니다. <집으로...> 기억 납니다.
카프카의 짧은 산문은 지금 읽어도 울림이 만만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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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3-08-20 1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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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나를 모른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그러니 어찌 다른 이를 알고 다른 사물의 완전한 실체를 알 수 있을까요.
카프카에 심취되어 뭔지도 모를 그의 소설을 읽느라 고생했던 적이 있었답니다.
바다에 대해서는 그가 어찌 놀건 내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을 했다는 것도 감사하지요.
그렇지만 열심히 쓰신 글 고개를 끄덕이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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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08-21 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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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혜 선생님, 주제에 대한 공감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카프카는 젊은시절 '도적'처럼 찾아와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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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3-09-02 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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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쭘한 일이지만 오랜 전에 쓴 시 한 편 올려드립니다.
바다로 간 사람들
류인혜
또 다시 지구의 지축이 흔들리지나 않을까
요즘처럼 매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무슨 이유로 기뻐해야 되는가
포경선 피쿠드 호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 사나이
에이허브의 잃어버린 한 쪽 다리를 생각한다
사나운 고래 모비 딕은 그 일로 승리를 기뻐했을까
헤밍웨이가 데리고 온 물고기는
앙상한 뼈만 남긴 채 긴긴 날을 바다에서 떠돌았다
자유에 굶주려 먹을 것을 찾아서 쪽배에 흔들리던
베드남의 보트 피플은 이제 배가 부르다
바다에서 건져준 한국인 선장을 부자의 나라로 불렀다
우리는 신세계를 찾아 떠났던 콜럼버스를 찬양한다
희망봉을 휘돌아 가던 바스코 다 가마도 기억한다
인간이 가진 강력한 힘을 기다린다
그때의 바다는 지금도 어지럽게 출렁이는데
바다를 휘저어 떠도는 영혼들은 자주 이름을 바꾼다
사람 이름 석자를 바다에 띄우려면
얼마나 오래도록 유심히 그를 바라봐야 될 것인지
푸른 휘장 속에 꿈으로 잠기는 순수이거나
매일 새로운 얼굴로 치장을 하는 천박함이거나
순간의 해일에 휩쓸리면 죽은 목숨인데
바다로 떠내려간 사람들은 언제 다시 돌아올 것인가
기다림은 바다보다 더 시퍼렇게 춥다.
<한국문인 2005년 4.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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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09-02 0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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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혜 선생님,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힘이 있는 시 한 편을 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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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3-09-04 2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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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장콕토의 분위기로 읽어가다가
도중에 박진광의 파도가 생각나는 글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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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09-05 1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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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군요, 정진철 선생님.
박진광은 궁금합니다. 찾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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