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을 보며

최원현/수필가. 문학평론가

nulsaem@hanmail.net

새 손님이 든 지 어느덧 다섯 달이 되었다. 하긴 이젠 손님이 아니라 어느새 주인이다. 자의건 타의건 시나브로 모든 중심을 다 차지해 버린 셈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한다. 뿐 아니라 기꺼이 수종(?) 들기를 마다 않는다.

다섯 달쯤 전 우리 집에 생긴 변화는 밤과 낮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아기가 깨면 낮이고 잠이 들면 밤이 되었다. 아니다. 아기는 밤이 될지 몰라도 식구들은 밤이 되지 못했다. 언제든 아기의 기침起寢(?)에 황급히 대령해야 하는 대기상태였다.

작은 생명 하나가 집에 들어오면서 이렇게 모든 게 변해버린다는 것에 참으로 놀랐다. 영향력이란 크고 많은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힘은 참으로 대단하단 사실을 이 나이에야 터득한 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자연적 원리를 거부하며 그저 거창하고 가시적인 것으로 승부를 하려 한다. 그러니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으리라.

어제 일이다. 내 모든 자료를 저장해 둔 메모리칩이 갑자기 인식불통이 되어버렸다. 그럴까봐 제일 좋다는 것을 샀었는데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불도 들어오지 않고 전혀 인식을 못한다. 우려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조금 전까지도 아무 이상 없던 것인데 말이다. 참으로 암담했다. 이 일을 어쩐다? 제조사로 연락을 해봤으나 하필 주말 휴무란다. 상담조차 할 수가 없다. 애꿎게 컴퓨터에 끼웠다 뺐다를 반복하고 컴퓨터를 껐다 켜기도 몇 차례, 아니 다른 컴퓨터에 넣어보아도 여전히 불통이다.

이 작은 메모리칩 하나를 어떻게 믿고 그 많은 자료들을 다 맡겨놓았단 말인가. 어찌 생각하면 한심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지금 우리의 삶이 대부분 그런 불확실한 것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는 사실에 다시 아연해 진다. 어찌 자료뿐이랴. 우리 목숨까지도 그 보다 더 못한 것에 아무렇지도 않게 맡기고 살지 않는가.

새로 이사를 한 곳은 전에 살던 곳과는 모든 환경이 너무나 다르다. 강남과 강동이라는 차이가 이리 심하게 날줄은 몰랐다. 차를 몰고 나가다 보면 내가 나갈 길이 없다. 앞뒤좌우에 사람과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그냥 어울려(?) 잘도 지낸다. 내가 가면 저쪽에서 멈추고 전혀 의식 않고 사람이 건너가도 차는 또 그걸 잘 피해 간다. 불쑥 불쑥 나타나는 오토바이며 자전거는 더 거침이 없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나가 봤더니 나 또한 그래졌다. 그렇게 몇 번을 거치니 나도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강남에서 그토록 질서에 예민해 있던 것이 여기선 무질서 속 질서로 전혀 불편하지가 않다. 아마 며칠 안가 이 분위기에 오히려 더 잘 적응해서 아주 좋아져 버릴 것 같다.

손녀를 가슴에 안아보면 그 작은 가슴이 팔딱이는 모습과 숨소리가 어찌 그리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고 작은 생명이던 것이 요즘엔 곧잘 뒤집기도 한다. 이내 기고 일어서고 걷고 뛰겠지. 거기에 따라 우리 집 살림살이들도 아기의 필요와 불필요를 따라 위험요소를 제거하며 신속하게 변화할 것이다. 기는 아기의 손이 닿을만한 곳에서 서서도 닿을 수 있는 위치까지는 아마도 모두 피난을 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도 귀찮거나 불만스럽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왜일까?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고 앙증맞은 볼에 내 손가락을 살짝 대 보았다. 내 손가락마저도 거인의 팔뚝처럼 비교되는 아기에게서 아침 이슬과도 같은 신선함과 맑음과 밝음을 본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작다고 해서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리라. 그것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볼 때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지는 것이리라.

내 메모리칩은 작아서 휴대하기에 편했고 모양도 예쁜데다 무려 4기가의 용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건 필요해서 컴퓨터에만 연결하면 자료를 제공해 주는 일등 비서였다. 그런데 그게 탈이 났고 복구가 될지 안 될지 현재로는 미지수다. 복구될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지만 장담은 할 수 없다. 아니다. 나는 꼭 복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에 건다는 말은 절대적 신뢰의 표현이다. 벽에 박힌 못에 무엇을 걸더라도 그걸 지탱할 만하지 않으면 결코 그걸 걸지 않는다. 아기의 초롱한 눈매를 바라보면서 내가 이 아기에게 거는 것은 무엇일까. 메모리칩에 내맡겼던 자료처럼 아기에게도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질서 없이 대충 서로 비켜가며 가는 그런 자유로움의 신뢰도 아닐 것이다. 새 생명에 거는 기대와 믿음은 그가 순리적으로 아름답게 자라서 제 몫을 멋지게 해 주길 바라는 믿음이다. 저 맑고 순결한 눈동자에 선하게 세상을 보는 긍정적 생각과 사랑이 가득 차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그렇게 새 생명을 보며 다가올 아름다운 새 날들을 미리 본다. 10년 후 그리고 20년 후, 아니 더 먼 훗날까지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