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학 출 꾼 (學 出 꾼)
정 진 철
“학출은 이리 나오시오.” 검거 되어 온 60 여명의 여자 노동 조합원 속에 섞여있던 10여명의 남자 노동자들 중에서 30대 초반의 한 젊은이가 느린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건물 3층을 점거하고 저항하던 파업 농성을 주동한 인물이다. 그가 학출이고 이 파업 농성사건의 주동자라는 사실은 이미 우리 정보원에 의하여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그도 그런 사실을 농성중에 인정한터라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학출이란 학사 출신 위장 취업 노동자를 뜻하는 말임을 수사관인 우리들과 꾼들 간에는 통하는 은어이다. 파업 농성을 주동하는 노동자를 굳이 "꾼"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파업 투쟁은 구속을 자청하는 일이었고 그 반복되는 구속 경력이 곧 계급성이 강한 발전된 활동가임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꾼들에게는 구속이 달리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다음 주동자가 누구인가”
“나는 모르오”
“이번 농성사건의 배후는?”
“우리들 자체적인 투쟁이요”
정치적인 투쟁 보다는 비교적 온건한 임금 인상 투쟁을 내세운 것으로 보아서는 서노련 보다는 남노련이 배후인 것 같았다. 80년대 당시에는 학생들이 주도한 노동 운동은 한때는 비타협적 선도적 정치 투쟁을 지향하는 민투(MT)와 임금이나 노동 조건 개선 같은 일반적 이슈를 앞세워 대중속으로 파고드는 주류 (MC) 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일반 노동 운동도 전자는 서노련과 연계되고 후자는 남노련과 연계된 것으로 구분되었는데 그렇다면 이번 주동자는 일련의 투쟁 방식으로 보아 남노련에 속한 인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배후를 밝히고 하부조직을 색출하여 어떤 학습을 지도 해왔는지에 따라 국가 보안법의 적용 여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주동자를 검거한 이후에 수사관인 나로서는 1.5미터 가량의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와의 치열한 싸움을 치러 내야 한다.
나는 시간에 쫒기며 알아내야 할 내용들을 파헤쳐야하고 그는 조직을 보호하고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결사적인 방어를 해야 한다. 나의 회유와 협박에 대하여 며칠간 파업 농성을 주동하느라고 누적된 피로도 잊고 정신을 가다듬고 항전의 태세로 임하는 그로서는 나와의 싸움이 곧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것이다 .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사상에 확신하고 있는것 처럼 나 또한 비록 그를 취조하는 수사관으로서 입장이 상반되어 있지만 나의 국가관이나 가치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정직하다고 자부한다. 지금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위하여 저항했던 노동운동과는 다르다. 그러나 자기들 조차도 입장이 다르면 투쟁도 같이 할수 없다는 배타적이고 종파주의적인 꾼들과의 문답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허공만을 그리기 일쑤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묵묵 부답 아니면 더 이상의 답은 없으니 주동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빨리 구속시키고 끝내달라는 무언의 주문이다. 처음 들어온 사람 같았으면 숨 막힌다고 생각되는 이 좁은 공간에서 여유롭게 설렁탕을 먹는 솜씨로 보아 얄미운 생각이 치민다.
“결국 자네도 종파사대주의자 아닌가”
나의 이말에 무반응으로 일관했던 태도에 뜻밖에 변화가 왔다.
“ 내가 왜 사대주의란 말이요. 현 정권이 외세를 끌어 들이는것이 사대주의 사상에 젖은것이고 독재를 일삼아 반외세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는 내가 사대주의란 것은 어불성설이요”라고 한다
“여기는 외세와 독재가 있다고 치자. 자본주의 사회가 외세가 없을수 없고 굳이 현정권을 독재적이 아니라고 전적으로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렇게 투쟁 일변도로 나가서 얻는게 무엇인가”
“우리가 투쟁하는 것은 독재의 방법으로 특혜와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자본주의를 핑계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노동자의 권익주장에 대해 억압으로 일관하는 처사에 저항하는 것이요”
“자네의 의견을 무시하는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개발 도상에 있는 우리로서 개발 독재를 이해하는 계층도 상당수 있다. 다만 이것도 독재라고 한다면 북한의 교조주의는 무엇이라고 설명할텐가”
그러자 그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북한의 체재에 대하여 내가 언제 찬동한다고 했소?.”
"그러면 결국 자네가 지향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 자주. 민주 그리고 통일이요”
나는 그에게
“궁극적으로 통일이 목표라면 여기서 투쟁하면서 얻는 만큼 북에도 변화가 있어야 기대할 것 아닌가. 여기서는 투쟁의 결과는 구속이고 나와서 다시 투쟁할 수 있는 자유라도 있지만 북에서는 곧 숙청으로 이어지는데 이에 대한 자네들의 대책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 어떻든 자네도 조직에 속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간부이든 지위가 어떻든 간에 그 일원이 아닌가. 그 조직을 아직 말하지 않고 있지만 자네 생각에 우리 노동 운동계가 말로만 대중 대중 하면서 대중의 진짜 권익은 뒷전에 두고 파벌 싸움으로 주도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종파주의로 치달아 온 사실을 인정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 운동계도 지금 그점은 반성중이요“ 나와 그의 대화는 제법 진지하게 계속 되었다 ,
"이보게, 자본주의라는 것은 어쨌든 경쟁 사회인데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을수 없고 아직 열악한 기반에서 노동자가 원하는 만큼의 댓가와 근로 조건을 충족시킬수는 없는일 아닌가”
“물론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올바른 노동 운동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전위가 되는것이요”
“그렇다면 투쟁이 연속되어야 변화된다는 것인가. 그 논리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러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막스-레닌주의에 대하여 압니까?“
”그럼 자네는 막스- 레닌주의에 따라 전위 활동을 하는건가? “
”우리 운동의 지침이 거기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게 뭐 있습니까?“
” 그것이 바로 종파 사대주의라는 말일세, 그리고 막스가 혁명적 변화를 직접 이야기 한것은 아니지 않는가“
”혁명은 레닌이지만 이론의 원천은 막스 아닙니까“
” 나는 막스보다도 막스가 죽고난후 엥겔스가 과격한 결론을 지어낸 것으로 이해 하고 있네“
” 그러나 어떻든 지금 우리나라의 체재는 올바른 민주주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특정재벌에 대한 노동 착취와 억압에 대해서는 분명히 모순을 안고 있는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바로잡는데 앞으로도 포기 하지 않을것입니다“
그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전갈이 왔다. 그의 처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맨다는것이다. 폐결핵 중증에 시달려 온 모양이다 얼마나 먹지 못했으면 그런 병이 걸렸을까 하는 측은한 생각이 든다.
나는 그에게 사실대로 알려 주었다. 처음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듣던 그도 잠시후 어깨를 들먹거리기 시작하더니 책상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한다. 후에 안일이지만 그의 처도 같이 노동운동을 하던중 만나서 결혼한 사이라고 한다. 나는 새벽까지 그를 혼자 놓아두고 고민을 했다. 아침이 밝아 오면서 그에게 병원에 다녀 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의아해 하더니 완강하게 거절한다. 아마도 조직에서 배신자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병원에서 들려 오는 소식은 임종을 준비해야만 할 급박한 사정인것 같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그에게 그와 같은 사정을 이야기 해주고 자네 신병에 대하여 내가 책임질테니 나하고 같이 병원에 갔다 오자고 했더니 잠시 고민하더니 따라 나선다.
병원에는 몇 명의 가족들이 와 있었다. 그를 보고 눈물만 찔끔 거리는 모습을 보니 가족들 조차도 이젠 이렇게 잡혀서 들락거리는 것에 어느정도 익숙해진듯 싶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한모금 깊게 빨았다. 왠지 속이 너무 답답해서였다. 속으로는 차라리 처와 함께 도망가버리라고 생각하면서 병원 정원을 서성 거리는데 한참후 그가 이젠 가시지요 하면서 나오는 것이다. 임종은 안하고 자기를 보더니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고 한다.
1년후 형을 받고 출소 한후 나를 찾아 왔다. 부인과 함께 조그만 봉제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조직에서는 받아주지를 않아서 손을 떼게 되었으나 나름대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을 막고 열악한 권익보호를 위한 운동은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나는 자본주의란 내 생각에는 경쟁 사회이니 만큼 기회를 잡는 자와 놓치는 자가 있을뿐 자네 생각처럼 뺏는 자와 빼앗기는 자가 있는 모진 사회는 아니라고 이야기 해주었으나 그는 웃움띈 얼굴로 내 손을 한번 쥐고는 떠났다. 나에 대한 호의를 표시한 것일뿐 나와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이데올레기의 평행선은 그대로 변하지 않은채 말이다.
